[경제시평-김동환] 작지만 강한 나라
입력 2012-05-13 18:25
꽤 오랜전의 일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노사정위원회 멤버 자격으로 북유럽 여러 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다. 노동자·사용자·정부 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산업평화를 이루고 복지국가 실현에 성공한 비결을 귀동냥이라도 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더니,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았던 쓸쓸함과 허탈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가장 인상에 남는 나라는 유엔이 발표하는 ‘행복한 나라’ 세계 1위 덴마크였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일 겁니다.” 노동부 차관의 자랑 섞인 일성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거야 복지가 잘돼서 그런 것이겠지요. 그런데 재원은 주로 세금이라지요? 그렇게 세율이 높아 기업들이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 할까요?”라고 받아쳤다.
그랬더니 “당신네 나라에선 세금 많이 내라고 하면 기업들이 외국으로 나가나요?”라고 반문하며 “사실 지나친 복지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 고민”이라는 ‘겸손’까지 잊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카운터펀치를 맞고 말문이 막혔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동화 속 나라처럼 온 동네가 눈에 파묻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요한데 백설공주가 살고 있을 법한 소담스런 레스토랑의 불빛들이 상처 난 자존심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이른 저녁을 들며 하루 일과를 복기하고 있던 때, 성에 낀 창문 저편으로 어렴풋하게 서해대교가 걸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해대교가 아니라 앙숙이었던 두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을 잇는 외레순 대교였다.
이 다리를 만든 덴마크 회사가 서해대교를 설계하고 감리했다는 주재원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공장 굴뚝,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굴지의 기업 하나 찾아보기 어려워 4만 달러를 넘는 1인당 국민소득을 유지하기 어려울 텐데 도대체 이 나라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하던 차였다. 주재원의 말이 이어졌다. “낙농업만 있는 게 아니죠. 설계, 디자인, 제약, 풍력, 그린 IT…뭐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키우려 하는 신성장 동력산업이 오래전부터 중소기업에 의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탈세와 절세를 위해 법을 만들고 바꾸고 로비하고 여의치 않으면 공장을 해외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여전히 대마불사의 신화가 살아 숨쉬는 나라. 산업평화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목청만 높이고 정작 실천은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나라. 양극화를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신성장 동력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용두사미가 되어 버리는 나라.
일부 기업과 개인 역시 약자보호정책에 편승하여 자조·자립정신을 잃어가고, 그래서 모든 불행은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원망하며 스스로 미래를 포기해 가는 나라…. 이런 나라는 아니겠지, 적어도 다음 정부는 이런 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하고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다시 한번 지펴보는 사람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여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대다수 국회의원이 자전거로 출퇴근하지 않더라도,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던 그룬트비 목사가 없어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귀국길에 오르기 전 그룬트비 목사 추모교회에 들러 상념에 잠겼다. 오래된 나무 의자 외에 아무런 장식도 소품도 없는 지극히 소박한 그곳에서는 그저 낮은 데로 임하라는 메아리만이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방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