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고혜련]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입력 2012-05-13 18:20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나도 당신도 아닙니다. 하지만 나뭇잎이 조용히 흔들릴 때 바람은 살며시 지나갑니다.” 40년 전, 꿈 많은 10대 소녀들에게 이 글을 들려주던 당신은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모습은, 이제 옛일을 벗 삼는 저희들 가슴속 아름다운 풍경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요, 그때 선생님, 당신은 열정과 패기가 가득했지요. 저희는 그저 장난기 가득한 철부지였고요. 당신의 웃음, 몸짓, 목소리는 저희들을 압도했습니다.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I nor you….” 치열 고른 당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국어를 저희는 모이를 탐하는 어린 새처럼 정신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아니요, 저희가 받은 것은 단지 이국어가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 변화를 꿈꾸게 한 미지의 바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불현듯 성숙해지며 젊음을, 사랑을, 미래를 노래하게 됐습니다.

저희는 선생님이 주신 사랑을 먹으며 아침이면 학교에 모여 쉼 없이 재잘대며 희망을 노래했고, 지금 저마다 제자리에서 그 소망을 일구며 그 소중했던 기억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눈을 감으면 함께했던 세월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거기 우리를 설레게 했던 5월의 햇빛 쨍한 교정,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싱그러운 라일락 향기를 함께 느끼며 우린 다시 한번 입을 모아요. “Who has seen the wind?” 그러면 저흰 나이를 잊을 수 있겠네요. 그럼 저흰 삶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네요. 우리는 힘든 일상 잠시 잠시, 그 아침햇살과 노래를 기억하며 쉬어가렵니다.

선생님, 참 잘 사셨습니다. 당신 머리 위 부드럽게 내려앉은 은회색 세월이 말해주네요. 당신 얼굴 위 잔잔하게 자리 잡은 온화한 주름과 미소가 말해주네요. 그래요, 당신은 참 잘 사셨습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흠모하는 그 많은 제자들이 말해주네요. 수십 년 당신을 지켜보고 사랑해온 지인들이 말해주네요. 그동안 일궈 오신 성실하고 의연한 삶, 그 찬연한 빛이 말해주네요. 우린 그런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용기와 인내를, 소박함과 유머를. 바람 같은 자유로움을….

선생님, 저희도 이제 초로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선생님을 만났던 아침 녘의 싱그러운 햇살은 서서히 그 광채를 거두려 합니다. 선생님, 다시 한번 저희 가슴에 한줄기 바람이 일게 해주세요. 회한과 번뇌, 아픔을 거두어가는 바람을. 모든 사랑과 지혜, 선함을 가져다주는 바람을요. 우린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며 40년 전 그때처럼 티 없이 웃고 싶습니다. 오래된 그때처럼 희망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이제 당신과 저희의 만남이 얼마나 기막힌 숙명인지 알 것 같네요. 늘 저희 가슴 한 켠에 든든한 기둥이 돼 주신 절절한 인연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감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늘 강건하고 행복하소서!

고혜련 제이커뮤니케이션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