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9) 떼제공동체 ③환대
입력 2012-05-13 18:02
세상 나그네가 ‘나’를 얘기하면 들어준다, 행복해진다
떼제가 주는 은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환대받는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떼제에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수사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그네들이다. 많을 때는 매주 5000명까지 오고 1년에 10만명이 온다. 매주 토요일 저녁, 주일 오후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필자가 만난 스웨덴에 사는 한인 이숙일씨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버스로 33시간이나 걸려 왔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를 비롯, 전 유럽을 망라한다. 유럽은 말한 것도 없고 미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온다.
떼제의 은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서로 나그네이면서 마치 오랫동안 만난 형제와 같다는 데 있다. 처음 만나도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인 듯 한번 보고 싱긋 웃기만 하면 금방 친구가 된다.
왜 처음 만난 사람끼리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까? 떼제에서는 떼제에 여러 번 왔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매년 가족과 함께 온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자주 오느냐고 물으면 공통된 대답이 있다. “무엇인가 모르지만 환영받는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아요.”
누가 떼제에서 환영하는가? 누가 떼제의 주인이고 나그네인가? 모두가 나그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받는다고 느낀다면 그 실체가 무엇일까? 우선 환대의 중심에 수사들이 있다. 수사들은 기도 외에 나그네를 섬기는 일이 그들의 중요한 사역인 것처럼 산다. 이들이 나그네들을 섬기는 방식 중의 하나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매일 저녁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은 수사들 앞에 선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분명 시간으로 보아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내일 아침부터 시작할 인생의 실제적인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젊은이는 아마도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나이든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처한 어떤 영적 상황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사들이 길게 답변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해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들어줄 뿐이다. 기껏해야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러면 그 다음 날 나그네들은 조금 더 밝은 얼굴로 자기 길로 떠난다. 길을 가면서 길을 물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그네 길에서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 신앙의 길은 순례의 길이다. 그것은 천국까지 가는 은혜의 길을 걷는다는 일반적인 순례의 의미 이상의 순례의 길이다. 신앙은 언제나 익숙한 길만 가고자 하는 우리 자신에게 익숙한 길을 떠나 최상의 길을 걷게 하는 순례의 길이다. 신앙은 천국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다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긴 과정을 더 많고 즐기고 간다는 점에서 순례의 길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떠난다는 의미의 순례가 아니라 낯선 곳이든 익숙한 곳이든 새롭게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순례의 길이다.
신앙이 순례의 길이라면 교회는 나그네의 집이다. 순례의 집에 필요한 것은 나그네를 위한 정성스러운 환대와 그들의 허기를 채울 떡과 생수다. 지금도 이스라엘 유다광야의 베두인 촌에 가면 베두인들이 이렇게 환영한다. “알란 왈 살란(당신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차와 요구르트와 양고기를 내놓는다. 옛날 예루살렘에서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집에 깃발을 꽂아둔 집이 있었다. ‘음식을 준비했으니 와서 먹으시오’라는 뜻이다.
교회는 광야의 피곤한 나그네들을 향해 지붕 위에 높이 깃발을 꽂고 “여기 음식이 있으니 아무나 오시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언제나 식탁을 준비해야 하며 먹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뷰티풀 저택’과 같다. 피곤한 크리스천이 고개를 넘었더니 크고 아름다운 집이 나타났다. 이름은 뷰티풀 저택이었다. 문을 두드렸더니 주인이 나와 반갑게 영접했다. 곧 이어 신중, 경건, 분별, 자선의 이름을 가진 아가씨들이 나왔다. 그들은 크리스천에게 최선의 대접을 하며 고된 나그네의 길에서 피곤에 지친 그의 여독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새벽녘까지 깊이 자고 일어난 크리스천이 만족해서 이렇게 노래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나그네 같은 인생을 위해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가득한 곳, 주님이 예비하신 그 곳, 죄를 용서받은 이 몸, 이미 천국 문턱에 사네.”
이것이 바로 교회다. 우리가 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원들은 나그네를 환대하고 사랑하기 위해 있다. 유진 피터슨이 히브리서 13장 1∼3절을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었다. “사랑이 붙드는 가운데 서로 화목하게 잘 지내십시오. 필요에 따라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해 두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천사들에게까지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탈무드도 환대의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회당에 공부하러 가는 것보다 낫고 나그네를 구제하는 것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낫다.”
교회가 나그네의 집이라면 목회자는 마치 나그네를 맞이하는 사마리아 여관의 주인과 같다. 떼제의 환대의 중심에 수사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수사들만 환대하는 것은 아니다. 떼제의 환대의 조금 더 깊은 곳에는 떼제의 기본정신인 화해가 있다. 떼제의 창설자 로제의 마음에 불탔던 것은 화해의 정신이다. 그는 세계 2차대전 이후 분열된 교회, 분열된 사회를 살면서 이 화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마음이 있었던 것은 분열된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형제로 품고 분열된 유럽을 치유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집에 유대인까지 숨겨 주었다.
그래서 떼제 대예배당의 이름도 ‘화해의 교회’다. 이 교회는 1962년 독일의 ‘쉬넨 차이넨’(화해의 표징)이라는 기관이 보낸 기금으로 지어졌다. 교회당 밖에는 네 나라 언어로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가 화해하게 하소서.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신자와 불신자가, 갈라진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서로 화목하게 하소서.”
떼제 공동체의 정신은 화해와 일치다. 떼제의 환대 정신은 바로 화해의 정신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떼제 규칙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손님은 곧 그리스도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떼제를 찾는가?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떼제로 몰리는가? 분열과 갈등 속에 사는 세상의 상처 속에서 화해와 환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성이 더 중요하다. 신학자 올리버 크레멘트의 말이다. “우리는 핵심이 아닌 작은 부분을 인정할 때 서로 화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가? 우리가 화해와 환대의 정신을 잃고 우리 생각, 우리 이데올로기에 집중할 때 사람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화해가 환대를 낳고 환대가 사람을 낳는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