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62) 북한에서의 교회쇄신운동

입력 2012-05-13 18:07


한국교회도 친일 반신앙행위 청산 실패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친일청산을 통해 신앙적 정의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여 교회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동시적 과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마치 우리나라가 해방 후 친일청산에 실패했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친일적인 반 신앙 행위 청산에 실패했다. 친일 전력(前歷)의 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여전히 교권을 장악하였고, 교회쇄신론자들의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은 교권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해방 정국의 혼란은 교계도 동일했다. 친일 경력의 교권주의자들과 교회쇄신론자들 간의 대립은 결국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해방 후의 상황과 여러 교파들의 활동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 강요로 폐쇄되었던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여러 지역에서 교회와 지방회 혹은 노회를 재건하였다. 장로교를 비롯하여 감리교나 성결교회 등은 9월말까지 교회와 교회 조직을 복구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북한에서는 ‘교회쇄신운동’이 일어났다. 흔히 ‘교회재건운동’이라고 말해왔지만 단순히 외형적 조직이나 기구의 재건만이 아니라 영적 쇄신을 의도했다는 점에서 ‘교회쇄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운동은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이기선 채정민 목사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기철 목사가 담임했던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재건을 위해 기도하며 쇄신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또 평양노회는 1945년의 9월4일 산정현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었다. 부흥회와 3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면서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죄를 통회자복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출옥 성도 중심의 교회쇄신론자들은 9월 20일 신사참배에 대한 공적인 회개와 자숙(自肅), 신학교육기관의 재건을 골자로 하는 5개항의 교회재건 원칙을 발표하였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장로)들은 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권징(權懲)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痛悔淨化)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痛悔自服)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각노회(各老會) 또는 지(支) 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 교회재건안에 대해 다수의 교회가 지지하고 실행했으나,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일례가 1945년 11월14일 선천 월곡동(月谷洞)교회에서 개최된 평안북도 6개 노회(평동, 평북, 용천, 의산, 산서, 삼산) 교역자퇴수회였다. 해방을 기념한 이 부흥집회에 참석한 2백여 명의 목회자 중 감리교나 성결교 소속은 소수였고 절대다수가 장로교 목회자들이었다. 출옥 목회자인 이기선 목사와 만주 봉천신학원장 박형룡 박사가 강사로 초빙되었다. 이기선 목사의 간증 집회에 이어 박형룡 박사가 위의 5개 항의 재건 원칙을 발표했다. 이때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이들은 재건 원칙에 반대하고 자신들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했다고 변론했다.

특히 월곡동교회 담임목사였던 홍택기 목사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을 가결했을 당시(1938) 총회장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우격다짐의 합리화였으나 한 집단의 의사를 대변했다.

또 이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자숙은 개인이 결단할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공적 권징안을 거부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된바 있는 쇄신론자들과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이들 간의 최초의 만남이었던 교역자퇴수회는 교회쇄신의 험난한 행로를 예고해 주었다. 이때 이기선 목사 등은 교회쇄신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직감하였고, 후일 기존의 조직을 떠나 혁신복구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박형룡은 교역자들의 태도가 구태의연할 뿐만 아니라 회개의 의도는 없고 교권유지에만 급급한 현실에 실망하고 다시 봉천으로 돌아갔다.

평북 6개 노회 교역자 퇴수회에서는 ‘북한 5도 연합노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합의에 따라 6노회와 평양노회가 중심이 되어 이북의 5개도(道)의 16개 노회 대표가 1945년 12월 초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이북5도연합노회’(五道聯合老會)를 조직하였다. 이 기구는 이북지방에서 총회를 대신할 잠정적 기관이었다. 회장에는 김진수(金珍洙) 목사가 피선되었고 김철훈(金哲勳), 이유택(李裕澤), 김길수(金吉洙) 목사 등이 임원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이전의 교회재건 5개 원칙보다 완화된 6개항의 교회재건안을 결의했다.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하고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운동을 전개한다는 것 외에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3개월간 근신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구속력 없는 개인적 근신으로 완화된 것이다. 비록 평양노회와 봉천노회는 자숙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공산당의 권력 장악으로 북한의 교회는 또 다른 고난을 감내해야만 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