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아우성에 가만히 귀를 내어주다… 서원동 시집 ‘쉰일곱 편의 悲歌’
입력 2012-05-11 18:18
서원동(62·사진) 시인이 17년 만에 신작 시집 ‘쉰일곱 편의 비가(悲歌)’(책만드는집)를 묶었다. ‘우리들의 왕’(1983)과 ‘꿈속에서 꾸는 꿈’(1995)에 이은 세 번째 시집이다. 침묵의 시간은 길었지만 시를 읽어보면 그동안 시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얼어붙은 하늘가로 조심조심 흐르는/ 언어들의 물살 소리 들린다/ 자음과 모음이 몸부림치고/ 쉼표와 마침표 의문표가 서로 부딪쳐 깨어지는/ 비명 소리, 한숨 소리,/ 겨울의 빨랫줄 위에/ 여기저기 내걸려 펄럭이는/ 사전 속의 낱말들,/ 밤마다 내 가슴속에서 뒹굴다 스러져간/ 그 숱한 낱말들이 구겨지고 바스라진 채/ 아우성치고 있다/ 바동거리고 있다// 버림받고 외로운 언어들이여,/ 나는 너희들의 넋을 느낀다”(‘가만히 그 귀 기울이면’ 전문)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게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고 내게서부터 모든 것은 끝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질문과 각성은 이번 연작시에서도 여전히 반추된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시든 나뭇가지가, 땅강아지가, 두더지가, 구름이,/ 오징어나 갈치가, 호랑이나 노루가, 설란이,/ 말한 것일까//무어라 중얼거린 소리였을까/ 사랑에 대해, 삶과 죽음을,/ 신을, 인생을,/ 이야기하려 한 것일까//무엇이었을까/ 무슨 뜻이었을까”(‘중얼거리는 소리들’ 부분)
청자(廳者), 즉 듣는 주체로서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하고 나로 귀결된다”는 인식은 그의 시학적 기반이 되고 있다. 이는 ‘나’와 이어지는 세계의 기미를 읽어내고 그 소리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의지와 이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비록 차가운 결빙의 세계라 할지라도 ‘너’와 ‘내’가 엮어지는 소통 의지가 있는 한 아주 얼어붙은 죽음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낡은 거미줄로 뒤덮인 내 기억의 시계는/ 영원히 멈춰져 있네/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나지 않네/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있는 허방세계에/ 녹슨 닻을 내리고 있네/ 그대를 생각하며/ 그대를 꿈꾸며/ 그대를 그리워하며”(‘겨울 강가에서’ 부분)
우리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으로 불러보곤 하는 ‘그대’인 것이다. ‘그대’라고 불러볼 때 그 정서적 환기는 나라는 존재감의 확대로 돌아온다. 그렇기에 서원동의 ‘비가’는 이별의 상황을 만남으로 전환하려는 의지의 재확인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