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가슴에 묻은 그 이름 엄마!… 김주영 장편소설 ‘잘 가요 엄마’
입력 2012-05-11 18:18
책장을 펼치면 어느덧 일흔 셋에 접어든 작가 김주영이 어느 한옥의 툇마루에 앉아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초탈한 사람의 표정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장난기 가득한 소년 시절의 얼굴이 읽혀지기도 한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에 만화처럼 말 풍선을 그려 넣은 뒤 ‘잘 가요 엄마’라고 쓰고 싶어진다. 김주영의 신작 장편 ‘잘 가요 엄마’(문학동네)를 읽은 뒤의 소회이다. 문득 짚어지는 게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2007년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 명단에 김주영의 어머니 최옥랑씨가 포함돼 있던 기억과 그로부터 3년 뒤 들려온 최씨의 부음이 그것이다.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아우의 전화로 시작된다. “눈은 잘 감겨드렸어?” “눈은 일주일 전부터 벌써 감고 계셨는걸요.” “그건 왜?” “그야, 곧 숨 거둘 분의 속내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독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이것저것 보기 싫은 게 많았을 수도 있겠고 그 연세라면 당신이 가실 저승길이 훤하게 바라보였을 수도 있겠는데….”
고향을 지키고 있는 아우와 서울에 사는 ‘나’의 대화는 이렇게 건조하다. ‘나’와 아우는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다. 어머니는 ‘나’가 어렸을 때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외삼촌의 중매로 재가를 해서 아우를 낳았다. 이튿날 새벽에야 고향에 도착한 ‘나’는 짐짓 시큰둥하게 장례를 치른다. 어머니의 노구(老軀)는 바싹 말라 있었다. 잘 때를 제외하곤 평생 누운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어머니였다.
아우와 함께 한 줌의 먼지가 된 어머니를 뿌린 곳은 유년의 슬픈 추억이 있는 마을 뒷동산이다. 열다섯 살에 집을 나와 자수성가한 ‘나’는 고향과 어머니를 등지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막상 어머니를 묻고 나니 가슴 한 구석에서 애잔함과 미안함이 소용돌이치며 자꾸 흔들린다.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한 순간,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와 ‘나’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아우보다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장례를 치르고 아우와 함께 인근에 있는 텅 빈 외갓집에 들렸을 때 아우는 가족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형님, 그거… 알고 계십니까? 애숙이 누나가 어머니가 낳은 형님 친누나라는 거.” “누가 그래?”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형님만 모르고 있었지요.” “어머니가 그래?”
외삼촌의 딸로만 알았던 애숙이 누나는 어머니가 낳은 친딸이자 ‘나’의 누나였던 것이다. 순간 울컥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은 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 누나가 어머니를 부를 때, 왜 고모라 부르지 않고 꼭 너네 엄마라고만 불렀던 것인지 의구심이 생기고 난 뒤부터. 그리고 누나를 도회지로 야반도주시키는 일을 어머니 혼자서 비밀리에 주선한 것을 목격하고부터. 어렴풋이 우리가 친남매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250쪽)
사실 소설은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리얼리티가 묻어난다. ‘장한 어머니상’ 수상 소식을 생전의 어머니에게 전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소설가에게 직접 물어보는 일도 마뜩지 않다. 김주영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 마디 뿐이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