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⑭ 몸에서 피어난 생태적 여성주의… 시인 김선우

입력 2012-05-11 18:14


학생운동 현장서 찾아온 詩的 충동

세상 모든 딸들을 위한 청춘의 애상


김선우(42·사진) 시인은 강원도 강릉에서 모범적이고 내성적인 여고 시절을 보낸 뒤 1988년 춘천의 한 국립 사대에 진학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 이 모범생은 8년 전 일어난 ‘광주’ 사태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쇼크 상태에 빠져들었고 강도 높은 운동권 학생이 됐다. ‘운동’을 위해 문학 동아리가 필요했다. 앞장서 동아리를 만들고 회장이 됐다. 가두 시와 집회 시들을 쏟아냈다. 어느 날 그는 캠퍼스에 떠돌던 ‘빨갱이 동아리’라는 말을 불식시키고자 모교 주최 대학문학상에 응모해 대상을 거머쥔다. 운동뿐 아니라 문학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1989년 전교조 운동 땐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대학 4년 내내 그는 ‘불효녀’였다.

졸업을 앞두고 방황과 갈등은 더 깊어졌다. “당시는 학생운동의 사양기였어요. 현장으로 들어가는 선들은 끊어지고, 제가 꿈꿔오던 것들은 물거품이 됐지요. 정말 죽을 궁리까지 해 봤어요.”

그때 만난 한 줄기 빛이 문득 ‘시인’이 돼야겠다는 소망이었다. 2년 동안 눈만 뜨면 시를 습작했다. 1996년 그는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의 시는 온몸으로 반응한 다음에 나온다. 죽을 만큼 행복하다거나, 정말 분하고 분해서 철철 울고 난 다음에 그 감정이 몸의 밭에 씨앗으로 떨어져 시로 발아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빛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나는 아욱을 빠네”(‘아욱국’ 부분)

아욱을 치대는 손과 어깨의 노동에서 초록빛 즙과 거품의 시가 써지고 있다. 시적 충동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먼저 전도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쓰고 나면 탈진할 정도라고 한다. 시상이 떠오르면 몸이 먼저 반응하고, 가슴이 먼저 쿵쿵거리는 본능은 소녀 시절에 기인하다. 어릴 때 부모한테 사랑받으려고 애교 떠는 일은 재미없어했지만, 혼자 나무 밑에 앉아 나무랑 얘기하고 노는 걸 좋아했던 소녀. 하염없이 바라보던 바다 너머에 뭐가 있을까 상상하며 자연이 주는 다채로운 감각을 일찍부터 접하고 자란 소녀. 햇볕이 부서지고 파도 소리가 들릴 때, 눈을 딱 감으면 자신이 바다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소녀. 요정이 날아다니듯 몸이 대기를 날 수 있다고 상상하던 소녀.

그는 몸의 소리를 먼저 듣는다. 그 소리는 생태적 여성주의의 근원이라 할 어머니에게서 발원한다. 세상의 많은 딸들은 어머니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을 완성한다. “시인이라는 자의식으로 발명할 수 있는 언어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의 빛이 발하는 시기는 청년 시기인 것 같아요. 10대 말, 20대 초에는 육체의 감각 자체가 세상을 향해 물이 오르듯 피어나죠. 그때가 혁명적인 언어가 나올 수 있는 시기에요. 랭보처럼, ‘나는 천재야’라고 세상을 향해 소리 지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그때죠.” 이제 마흔을 슬쩍 넘긴 그는 이런 시로 청춘의 폐업을 애도하고 있다.

“내가 피 흘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공기방울이/ 내게 다가오는 저녁은 무서운가// 나를 기억하는 공기방울을 쫓아/ 수목원에 들어선 길이었다 들어서고 나니/ 마흔이었다 폐업 신고중인 수목원에서/ 출가한 시인의 소식을 듣는다/ 꽃잎이 느리게 졌다/ 누가 죽었다는 얘기를/ 다시 태어나려 한다는 얘기로 들을 때처럼/ 평화롭다”(‘마흔’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