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朝의 광기, 초원의 잔혹사… ‘중국의 서진(西進)’
입력 2012-05-10 18:34
중국의 서진(西進)/피터 C. 퍼듀/도서출판 길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중국의 영토는 청(淸)나라 때 확정된 것이다. 명(明)나라의 영토에 비해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중국은 대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그 역사적 위업을 달성한 주역은 만주족 중심의 청나라였다. ‘늘어난 영토’란 ‘중앙유라시아’로 지칭되는 ‘중간지대’였다. 청나라는 어떻게 그런 위업을 이룰 수 있었을까.
“초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도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삶에 가장 잘 적응한 유목민의 관습을 얼마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군대도 고향에서보다 더 많은 고기를 먹고 가축과 동물을 몰고 이동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들은 요새를 떠나 천막 막사에 묵어야 했고, 내륙 지역에 있을 때보다 말과 기병대를 훨씬 많이 활용했으며, 수레를 끌기 위해 유순한 황소 대신 말 안 듣는 낙타와 노새를 다뤄야 했다.”(69쪽)
한족 관리들은 초원의 환경을 적대적이고 혐오스럽고 이질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청의 만주족과 몽골족들에게 그것은 그리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명나라 때 완성된 만리장성이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을 안에다 묶어두기 위한 시도로 간주했다.
더구나 청나라의 대외정책은 기존 한족과는 달리 정복왕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만주에서 발흥한 만주족은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 확장은 물론 사회 자체도 정복왕조 체제를 갖춤으로써 서역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피지배지역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단순히 조공관계 수준이 아닌 정복지에 대한 적극적 이주정책과 강압적인 통치를 통해 반란의 싹을 애초부터 제거했다. 대표적인 통치권자가 건륭제(乾隆帝·1711∼1799)이다.
17세기 중반 강희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청나라의 전성기는 그의 아들 옹정제를 거쳐 18세기 손자 건륭제에 이르러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강희, 옹정, 건륭으로 이어지는 3대 134년에 걸친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건륭제는 조부의 위업을 이어받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등 국사 전반에 걸쳐 강력한 국가를 이룩해낸다. 18세기 서양이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로 급변하는 새 시대를 맞고 있었다면, 청나라는 건륭제라는 걸출한 황제에 의해 또 다른 의미의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건륭제는 한 번도 서북지역으로 가지 않았고 전투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방의 통제가 자신의 통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들 종족 자체를 말살시키는 데 주력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업적은 서북몽골과 톈산북로에 거점을 둔 유목국가 ‘준가르’를 흡수 통일한 데 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대략 200년에 걸쳐 신장, 위구르, 몽골, 그리고 러시아 시베리아 일부까지를 통치해온 준가르는 청과 러시아, 그리고 중앙유라시아 민족들과 방대한 교역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명나라 영토를 확보하고 서역으로 나가려는 청나라로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 제국 역시 팽창정책의 와중에 이 지역은 손에 넣어야 할 땅이었다. 따라서 17∼18세기에 걸친 정주민족(청나라와 러시아)과 유목민족(준가르) 간의 치열한 영토전쟁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현재의 중국 영토로의 획정은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족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거의 60만명에 육박했던 준가르의 후예는 공식적으로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수십만 가구 가운데 40퍼센트는 천연두로 죽었고, 20퍼센트는 러시아나 카자흐 영토로 달아났고, 30퍼센트는 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다른 이들에게 보내졌다. 수천 리 안에 준가르 천막이 하나도 없었다.”(359쪽)
텅 비어버린 준가르의 땅은 수백만의 한족 농민, 만주인, 투르키스탄 오아시스 정주민, 회족과 그 밖의 인구로 채워지게 된다. 준가르는 청과 대등한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는 세력 조정자로 참여했고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였던 러시아는 영토 팽창이라는 야욕을 채우지 못한 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진로를 수정해야 했다.
청나라는 준가르를 제거함으로써 비 한족 민족들을 종속적인 타자로 병합하는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이런 승리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18세기가 끝날 때 청의 통치자들의 자기만족, 전체성, 완수에 대한 논조에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는 데 대한 만족감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야만적인 적들이 없어지자 그들은 스스로가 19세기의 새로운 도전을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656쪽)
저자는 19세기에 들어와 청나라가 영국 등 서구세력과 맞닥뜨리게 됐을 때조차 준가르 지역을 평정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 서구세력을 그리 큰 위협 세력으로 보지 않는 판단착오를 했으며, 그 경험을 통해 해안지역으로의 외세 침입을 같은 방식으로 막아내려 했던 전략적 실책으로 패망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2005년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중국에서는 이 책의 역사서술 관점을 갖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기존 중국사 서술 관점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변경의 역사서술을 그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에 대한 치밀한 반박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책은 한족(漢族) 중심의 세계질서론에 대해 비(非)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론을 내세움으로써 그동안 하등한 것으로 평가되던 유목사회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 예일대 중국사 교수. 이 저서로 2006년 하버드대에서 수여하는 레벤슨 상을 수상했다. 공원국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