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 청보리밭 맥랑 ‘황홀의 극치’… 경북 포항 호미곶 보리밭
입력 2012-05-09 18:42
오월의 보리밭은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해맑고 싱그럽다. 보리밭의 초록색 지평선이 푸른 바다 수평선과 만나 색채의 미학을 완성하는 경북 포항 호미곶의 구만리 들판도 그런 곳이다. 바닷바람이 빗질할 때마다 물결치는 맥랑(麥浪)이 꽃멀미처럼 아찔한 보리밭에서는 종달새가 포르르 날아오르고 나날이 영글어가는 보리이삭은 추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해맞이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虎尾串)은 동해안 해안선이 남으로 내달리다 호랑이 꼬리처럼 툭 튀어나온 곳으로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다. 호미곶의 본래 이름은 장기반도에 위치했다고 해서 장기곶이었으나 2000년의 새천년 밀레니엄 행사를 앞두고 호미곶과 호미반도로 지명이 바뀌었다. 2010년 1월 1일에는 호미곶이 위치한 대보면의 이름도 호미곶면으로 변경됐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고,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해서 호랑이 꼬리는 국운상승과 국태민안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동해산수비록’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러시아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된다며 호미곶을 천하명당이라고 말했다. 일제가 호미곶에 쇠말뚝을 박고 한반도를 연약한 토끼에 비유해 호미곶을 토끼꼬리라고 비하한 것은 이 때문이다.
10만여평의 보리밭이 초록융단처럼 펼쳐지는 곳은 호미곶면의 구만리 일대 구릉지. 구만리(九萬里)는 구릉지가 많아 ‘구만(丘滿)’이라고도 하고, 아주 멀고 까마득한 곳이라 ‘구만(九萬)’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호미반도의 서쪽에 해안도로가 개설되기 전, 포항 시내에서 구만리로 가려면 멀리 구룡포를 에둘러야 해 오지나 다름없었다.
바닷바람이 강해 쌀농사가 힘든 구만리 일대는 본래 보리밭 천지였다. ‘구만리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말을 못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릿고개 넘기가 무척 힘든 깡촌이었다. 어렵던 시절 춘궁기가 되면 구만리 처녀들은 보리밭 밭두렁의 쑥을 캐 허기를 달랬다.
구만리를 대표하는 풍경은 호미면사무소 앞의 보리밭에 뿌리를 내린 여섯 그루의 소나무. 본래 다섯 그루였으나 10여 년 전 태풍에 한 그루가 가지가 꺾여 고사했으나 최근 두 그루를 새로 심었다. 그 중 세 그루는 수령이 100년 가까이 되는 고목으로 보리밭의 터줏대감을 자처하고 있다.
보리밭은 보리이삭이 피기 시작할 무렵 가장 아름답다. 이른 아침 호미곶 바다에 세워진 ‘상생의 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아침햇살이 보리밭과 소나무 가지를 황금색으로 적신다. 이어 햇살을 뒤쫓아 온 바닷바람이 보리밭을 휘젓고 다니며 만들어내는 맥랑은 황홀의 극치. 안타깝게도 보리밭 사이사이에 시금치 등 다른 작물을 심어 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파도처럼 물결치는 맥랑의 감동은 여전하다.
영일만을 배경으로 한 구만리 보리밭을 가슴 속에 담으려면 구만2리 마을회관에서 바닷가로 내려가거나 멀리 포항시내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이삭이 패기 시작한 보리밭에 종달새 대신 갈매기들이 너울너울 날아다니는 이색적 풍경이 펼쳐진다. 이삭이 누런 황금색을 띠기 시작하는 매년 5월 중순이면 포항문인협회는 이곳 보리밭에서 시낭송회 등 ‘보리누름행사’를 갖는다.
구만리 보리밭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는 빛바랜 앨범이나 다름없다. 산기슭 쪽으로 펼쳐진 보리밭 사이 시멘트길을 걷다 보면 인기척에 놀란 꿩이 푸드덕 날아오르고 종달새는 흥에 겨워 오월의 푸른 하늘을 제멋대로 날아오른다. 보리밭에 뿌리를 내린 커다란 바위들은 수천 년 세월동안 호미곶을 지켜온 고인돌. 시집와서도 쌀밥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구만리 아낙들이 보라색 붓꽃이 한주먹씩 피어 있는 밭두렁에 앉아 다리쉼을 하는 모습도 정겹다.
보리밭 사잇길을 걷다 문득 뒤돌아서면 푸른 영일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초록색 언덕 너머로 ‘상생의 손’이 갓난아이 손처럼 앙증맞게 보인다. 찾는 사람 없어 한적한 오월의 구만리 보리밭은 홀로 풍경화의 주인공이 돼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잊혀진 보릿고개를 홀로 넘고 있다.
포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