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9) 야쿠자·살인미수… 목회자 되어 다시 일본으로

입력 2012-05-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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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교회에서 가난한 성도 10여명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내 힘으로 교회당 월세 40만원에 우리 세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일단 눈앞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직접 돈을 벌기 위해 나서기로 했다. 새벽기도를 끝내면 바로 직업소개소로 가서 현장을 배정받아 닥치는 대로 소위 ‘노가다’ 일을 시작했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게다가 성하지 않은 몸으로 해나가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온 몸에는 항상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작업복을 넣은 배낭을 지고 나가는 모습을 한 젊은 성도에게 들켰다. 한 눈에 일하러 나가는 모습을 알아차린 그 청년은 나를 붙들고 교회당 월세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 일하러 나가지 말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 청년은 자신의 월급 70만원을 거의 교회에 헌금하고는 교회 안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그는 교회의 자질구레한 일도 도맡아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청년의 예쁜 마음을 받아들이셨다. 전혀 뜻하지 않게 예쁘고 능력 있는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사연인즉 이랬다. 교회에 처음 전도돼 나온 한 할머니가 찬양을 인도하는 그 청년에게 호감을 가지더니 자신의 손녀딸과 맺어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선 실제로 둘을 만나게 해서 결혼까지 하게 했다.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갖고 있던 할머니의 손녀는 가난한 청년의 부족한 점들을 감싸 안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해줬다.

그 일 이후로 교회도 아연 활기를 띠었다. 부르짖는 기도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이뤄지는 교회로 소문이 나서 성도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덕분에 지하를 벗어나 건물 2층과 3층을 한꺼번에 임대했다. 그때 몇몇 성도가 좀 무리를 해서라도 자체 교회당을 건축하자고 했지만 나는 좀더 기도하면서 여유를 갖자고 미뤘다. 요즘 나는 만약 그때 교회당을 지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그러던 중 나에게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우연히 일본 단기선교를 갔다가 오사카의 한 교회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속으로 ‘아, 하나님이 내 마음을 읽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0년 9월, 우리 부부는 교회를 아는 목사님에게 맡기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도착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도 기억 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일본 땅에서의 아픈 추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서 극심한 구박을 받으며 고생했던 일, 야쿠자의 조직원으로서 저질렀던 온갖 악행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전 재산 1700만원을 헌금해 성물과 성구를 구입하고 교회당을 보수했다.

그때부터 내게는 목사에다 선교사라는 칭호도 함께 붙었다. 나는 몇 명 되지 않는 성도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다니면서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간증집회를 했다. 아픈 과거를 가진 내가 하나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를 할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일본에서 내가 강점을 가진 건 노숙인들에게 복음 전하기였다. 그들을 만나 위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말하면 그들은 금세 친밀감을 보였다. 눈물을 흘리며 내게 다가와 악수를 하고 입을 맞추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내겐 주님의 향기 같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뒹굴고 위로하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후원 한 푼 없이 그런 사역을 이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