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8) 안양천 뚝방 천막교회…그곳에도 성령임재 축복이

입력 2012-05-08 18:28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간 나의 첫 사역지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의 오지에 있는 박달교회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의 교회에는 청장년은 거의 없고 어린이들만 몇 명 있었다. 나는 집집마다 돌며 집안 일손을 돕느라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 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들의 농사일을 돕기도 했다.

나름대로 보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곳에 오래 있지 못했다. 교회에 딸린 밭의 농사를 직접 지어야 하는데, 농사짓는 방법을 몰랐던 내가 고추 농사를 망쳐버린 게 화근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역을 하려면 거의 농사꾼이 돼야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박달리 주민들이 이삿짐을 서울로 실어다 주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지내다 신학교 동료 전도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서울 신정동에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원짜리 쪽방을 소개해 주었다. 누우면 다리가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을 수 없는 방이었지만 눈비를 피할 수 있는 게 감사했다.

그런 방의 월세조차 내지 못해 보증금이 거의 바닥이 났다. 워낙에 변변찮은 인물이다 보니 어디 사역지를 부탁해볼 데도 없었다. 아내에게 볼 낯이 없어 혼자서 속앓이를 하다 하루는 밤늦게 오목교 안양천변에 나가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찾으며 울었다. 그런데 그 시각 하나님께서는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이름 없는 천사가 집 주인에게 거금 300만원을 맡겨두었다는 연락을 해왔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 돈으로 인근에 보증금 1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방을 얻었다. 물론 같은 쪽방이지만 이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훌륭했다. 그 즈음 아내가 임신을 했다. 허다한 사람들이 다 가는 산부인과에 한 번 가지 못한 아내가 출산일을 넘겨서 난산을 하다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부랴부랴 산부인과에 갔지만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위험했다. 한동안 사투를 벌이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이번엔 병원비가 문제였다. 그런 차에 강서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병원비를 해결해주셨다. 이후 아내는 출산후유증으로 결핵을 앓아 다시 사경을 헤맸다. 이번에는 다른 목사님이 오셔서 치료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분들께 평생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들이다.

그분들께도 감사하지만 내가 진정 감사를 드리는 분은 따로 있다. 바로 나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다. 내 인생 고비 때마다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감격할 뿐이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목숨을 내드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마음속에 큰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짐을 덜어내야 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까지 된 내가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야 했다. 1989년 서울 오목교 안양천 뚝방길 위에 천막을 치고 교회 팻말도 붙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렸다. 전기 넣을 형편이 되지 못해 가로등에 의지해 저녁예배도 드렸다.

갖은 고생을 하며 기도로 1년 정도 이어가자 매일 예배에 참여하는 10여 명의 붙박이 성도가 생겼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에 매진하자 우리 사이에서는 너도 나도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느꼈다. 점차 기도의 불이 뜨거워지면서 병 고침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 해결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교회당을 마련하자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파출부로 힘들게 번 돈을 모아온 여자 성도가 통장째 가져오는가 하면 한 집사님은 은행 대출까지 내왔다. 아내의 친구들은 무이자로 제법 많은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이듬해 한 건물 지하를 빌려 영광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나와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목회자와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감당하는 일이 여전히 쉽지 않았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