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미국 정치의 민얼굴
입력 2012-05-08 18:09
아직도 우리나라 국회에서 법안 통과를 놓고 여당과 야당 간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질 때면 선진국이 본보기로 언급되곤 한다. 타협과 양보를 통해 이견을 좁히고 갈등을 해결하는 성숙한 정치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도 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제 그 명단에서 미국은 뺄 일이다.
2008년 ‘희망과 변화’를 호소하는 명연설로 세계를 감동시켰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보자. 지난달 24∼25일 오바마 대통령은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콜로라도대학, 아이오와대학을 방문했다. 현안이 산적한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을 이틀이나 비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이곳에 있었던 걸까.
백악관은 연방정부가 지원한 대학학자금 대출 금리의 동결을 의회에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정책 투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오바마의 재선에 결정적인 인구집단인 대학생의 표심을 잡기 위한 ‘선거용’이란 게 분명했다. 이는 백악관이 대선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합주(swing state)에 있는 대학 3곳을 고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연히 공화당에서 날 선 비판이 날아왔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국민의 세금이 시간당 17만9000달러가 든 이번 경합주 여행 경비를 대통령은 국고에 반납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오바마가 젊은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실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가 된 학자금은 연방정부가 저소득층 대학생 자녀에게 대출하는 스태퍼드론으로, 7월부터 금리가 오르더라도 새로운 대출 분에 한해 적용된다. 오바마가 기존 대출자들의 부담도 연 1000달러씩 늘어난다는 식의 뉘앙스를 준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욱이 스태퍼드론 규모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바마가 학생들의 학자금 부담을 줄일 핵심 조치는 놔둔 채 ‘가짜 의제’를 내세워 정치 공세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인상은 오사마 빈 라덴 사살 1주년에 맞춘 그의 아프가니스탄 깜짝 방문 이벤트에서 더욱 강화됐다.
문제는 오바마의 이러한 대중영합주의적 쇼맨십이 의회(하원)를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의 극단주의와 편협함에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는 사실이다. 오바마의 경기부양책과 금융개혁 법안, 부유층 증세 법안 등 그가 설정한 핵심 의제들을 공화당은 철저히 가로막아 왔다. 무조건 세금을 줄여야 한다는 게 공화당이 추구하는 절대선이 됐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미 의회 전문 학자 토마스 만은 “오바마 집권 2년간 대통령이 추진한 법안 거의 모두가 하원과 상원에서 공화당의 격렬하고 만장일치의 반대에 부닥쳤다”며 “4년째인 지금 미 정치는 역사상 전례 없는 사실상의 그리드락(gridlock·오도 가도 못하는 정체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그리드락은 지난해 미국 역사상 처음인 국가신용등급 강등으로까지 이어졌다.
공화당의 변화는 당내 중도 내지 온건파의 소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현재 공화당에서 증세에 찬성하거나 낙태 등 사회적 의제에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의원은 예비선거(프라이머리)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분위기다. ‘티파티’와 부자 증세에 반대하는 ‘세제개혁을 위한 미국인(Americans for Tax Reform)’ 등 보수주의 정치단체의 영향력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경제 현실을 크게 벗어날 정도로 우경화된 공화당이 타협과 균형의 가치를 상실해가고, 대통령은 대중영합적인 정치술에 의존해야 하는 게 미국 정치의 현주소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