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7) 클래스메이트 신귀이, 첫 고백에 선뜻 아내가 되다
입력 2012-05-07 18:19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중 같은 과에서 공부하는 한 여학생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여학생 사귈 만한 형편도 못됐지만, 서너 명의 여학생 중 유독 그녀에게 자꾸 마음이 끌리는 걸 나 자신 어쩌지 못했다. 알고 보니 신귀이라는 이름의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남학생도 몇 명 있었다. 그런 중 한 번은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자 삼각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앞뒤 재지 말고 자신있게 청혼하라”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며칠 동안 뜸을 들이다 그 여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내가 꼭 할 말이 있는데 같이 식사라도 합시다.”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순순히 응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다음에 본론을 꺼낼까, 아니면 오늘 바로 대시할까’ 고민하다 용기를 냈다. “저,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뺨이라도 한 대 맞을 각오를 했는데 “글쎄요”라면서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내 거처인 고물상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거지와 다름없는 내 실상을 솔직히 보여줬다. 그런데도 그녀는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일반적 여자라면 질겁하고 달아났을 터였다. 알고 보니 그녀가 기도를 하면 계속 십자가 앞에 누더기를 입은 남자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누가 봐도 이상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결정은 이상함을 넘어 무모했다.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살며, 거기다 신학교까지 다니는 형편이지 않은가. 역시 결혼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가 부모의 반대가 대단했다. 딸의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데, 어느 부모가 받아들이겠는가.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도저히 먹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서울 구로동의 조그만 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고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쪽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맨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은 팍팍하기 짝이 없었다. 아내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고 살림살이를 이어가다 보니 몸은 항상 녹초가 돼 있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부요하고 행복했다. 아내는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하고 내 편이 돼주었다. 특히 결혼 후에도 핍박을 계속하는 처가 부모에게 아내는 “하나님께 크게 쓰일 사위이니 두고 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아내는 나의 모난 성격을 고칠 수 있도록 매사에 신경을 기울였다. 아내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는 결혼 1년 정도 지나면서 누가 봐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결혼하고 2년 정도 지나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나를 못마땅해 하던 처가 부모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나를 자랑스러운 사위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불교와 유교가 뒤섞인 이상한 신앙을 가졌던 두 분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도 나갔다. 지금도 두 분은 우리 부부에게 든든한 힘이 돼주고 계신다.
그런 가운데 나의 기구한 과거의 삶이 주위에 조금씩 알려지면서 간증을 요청하는 교회가 나왔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성껏 기도로 준비해서 최대한 진솔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인천 숭의감리교회 금요철야예배 때 1만여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성령의 감동에 도취돼 2시간 넘게 간증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 당시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우리 부부가 유난히 좋아했던 찬양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였다. 쓰러질 정도로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이 찬양을 불렀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우리 주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옵소서”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