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윤태일] 키치들의 전성시대
입력 2012-05-07 18:48
“균형감의 상실에 따른 사이비, 짝퉁이 활개치는 문화 전반의 양태 종식시켜야 ”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의 현실감각.”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른 정치인의 자세를 강조하며 40년 가까이 줄곧 해오던 말이라고 한다. 이상과 현실, 당위와 존재,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과 냉철한 현실인식 사이의 균형감각을 강조한 이 말은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자세일 것이다.
이상과 현실, 당위와 존재의 조화를 이루면서 양 극단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쪽으로 손쉽게 함몰된다.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르는 중용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친 태도와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그 속내를 보면 많이 다르다. 비슷하지만 아닌 것, 그것이 바로 사이비(似而非)의 본래 뜻이다.
이런 사이비의 문화적 양태가 키치(kitsch)라 할 수 있다. 본래 사이비 모조품, 속여서 판 물건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키치는 진품을 흉내 내는 사이비, 명품을 흉내 낸 짝퉁을 말한다. 조중걸은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 키치를 고전예술, 현대예술, 통속예술과 대비시킨 바 있다. 그러면서 클래식이라 불리는 고전예술이 양의 가죽을 쓴 양, 전위적 실험을 감행하는 현대예술이 늑대의 가죽을 쓴 양, 통속예술이 늑대의 가죽을 쓴 늑대라면 키치는 양의 가죽을 쓴 늑대라고 비유했다. 통속예술과 달리 키치가 고급예술을 흉내 내는 사이비라는 것이다.
키치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단순히 어떤 대상이 원래부터 키치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키치적 태도가 드러난다. 이발소에 걸린 밀레의 그림 ‘만종’이나 푸시킨의 시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에서, 그리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졸부의 텅 빈 서재를 채우는 장식품으로만 기능하는 것에서 우리는 키치적 양태를 발견한다. 그들은 더 이상 고전예술의 감동이나 인류지식의 집대성으로서 가치를 발하지 못한 채 부적합한 장식기능만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사이비로서의 키치이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사이의 힘겨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어느 한쪽으로 손쉽게 함몰될 때, 기계적 중립만을 표방할 때, 혹은 최악의 경우 서생의 한심한 현실감각과 상인의 저급한 문제의식이 결합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중용이라 할 수 없다. 무늬만 중용인 사이비라는 점에서, 그리고 부적합한 과잉이라는 점에서 키치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 문화 전반에서 이러한 균형감이 상실되면서 ‘비슷하지만 아닌’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 키치들의 전성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심지어 이런 양태에 가장 심하게 저항해야 할 대학에서마저 균형감의 상실에 따른 키치적 양태가 도처에서 관찰된다.
진리탐구의 상아탑이라는 이상, 그리고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면 제 앞가림은 하게 해 줘야 되는 것 아니냐?”는 학생과 학부모의 현실적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힘겨운 노력은 모든 교육의 의의를 취업률로 단순화해버리는 정책으로 인해 키치적 양태로 함몰된다.
한국 교수들이 젊어서는 왕성하게 연구를 하다가 금방 조로하여 나태해진다는 비판이 많다. 사실 평균적으로 1년에 한 편 정도의 논문이나 저서를 쓰지 않으면서 자기 나름의 학문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연구실적에 대한 적당한 인센티브와 강제조항이 연구 활성화에 자극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모든 학문적 성과를 논문 편수로 단순화시킬 때 학자적 자존심과 생활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힘겨운 노력은 포기된다. 그 결과 찍어내는 수준의 키치적 논문들이 양산되기 쉽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사이에서 양쪽을 아우르는 균형감각의 회복을 통해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키치들의 전성시대를 끝내야 한다.
윤태일 (한림대 교수·언론정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