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가족, 그 불편한 진실
입력 2012-05-07 18:46
가친께서 20일 넘게 입원 중인데 병구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아버지는 류머티즘 질환 때문에 30년 가까이 편찮으셨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제 어릴 적, 아버지의 결기는 대단하셔서 가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요즘 밤새 간병하다가 총기 분명한 부친이 저를 부르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트라우마가 있어서죠. 외국 사는 형님은 옛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 부분만 나오면 “됐다”며 말을 자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사시고 또 그 자세로 투병생활하시는 저 어른 얘기를 누구에게 해야 속 시원할까요. 오십 넘은 아들은 불쌍한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에게 살가울 수가 없습니다.
가족.
든든한 울타리. ‘행복’의 다른 말. 나의 출발점이자 종착역. 세상이 어려울수록 더욱 빛나는 가치. 그러나 좀 더 들어가면 무조건적인 이해를 강조하는 불합리한 공동체, 사랑의 원천이자 상처의 근원, 온갖 모순과 불합리를 겪어야 하는 동굴 안과 같은 곳.
그럼에도 우리는 신성불가침의 이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유토피아의 원형이자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편적 가치와 창조주가 보여주는 천국의 모형을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착각하고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즉 우리에게 가족은 ‘행복해야 한다’가 현실인데 ‘행복하다’로 믿어 의심치 않고 사는 데 따른 불행이 적지 않습니다. 강요된 행복이지요.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정상가족 행복론’입니다. 같은 문화와 국적을 가진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이 행복할 것이란 학습. 그래서 ‘결손가정’이란 말이 차별을 담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다문화, 다성(多姓), 한 부모, 조손, 비혼 모, 동성애, 나홀로 등의 탈근대 가족이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통계청 자료로 42%만이 소위 ‘정상가족’인데 그렇다면 나머지 ‘비정상가족’은 불행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사회학자들은 ‘가족’이란 개념보다 ‘가족들(families)’이란 대체 용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냐?”
예수의 말씀입니다. 집회를 이끌던 예수께 제자가 다가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는다고 하니까 뒤로 나자빠질 충격 발언을 한 것이지요. 그러고선 집회 참석자들에게 “당신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라고 합니다. 하나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란 얘기죠.
가족은 천국의 모델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그 가장은 신탁자에게 위임받은 이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 관계를 부정하다 보니 극단의 애착이 생기는 겁니다.
미국 정신과 의사 머레이 보웬은 가족 간 파열음을 ‘불안한 애착’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력과 자기통제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에게 병리적인 애착을 보이는 증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할퀴는 이 현실은 가장된 친밀함이 주는 병폐입니다.
영국 가족 정신치료의 권위자 존 하웰스는 “가족은 환자를 돕는 배경이 아니라, 가족 자체가 바로 환자며, 증상을 가진 개인은 그 가족의 정신 병리를 드러내는 개체”라고 주장합니다. 강요와 애착이 병리를 대물림합니다.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적당한 거리의 사랑과 배려입니다.
전정희 디지털뉴스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