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6) 시련의 신학대 “주만 따르는 길 누가 막으리까”
입력 2012-05-06 18:03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대보자.’ 나는 제주도의 한 교회를 찾아갔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리고 주어지는 대로 교회 일을 했다. 교회학교와 청년부에서 봉사하면서 오히려 내가 많은 걸 배웠다. 그런 중 어릴 때 고아원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를 만나 골재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틈틈이 중등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한번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계속 이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상하다 싶어서 장로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장로님이 “사명자로 부름 받은 것 같다”고 하셨다.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았다. 의식주도 간신히 해결하는 입장에서, 배운 것도 없는 내가 무슨 목사가 된다는 말인가. 한데 그날 밤 잠자리에서 비몽사몽간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또 그 구절이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찼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로님에게 내 각오를 전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 중에 생각지도 않은 제안이 들어왔다. 고아원을 나온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선배가 찾아와선 큰 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데,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순간적으로 사탄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노 생큐’였다.
1981년 12월 26일,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주노회에 소속된 제주성서신학원에 입학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무슨 신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 면전에서 대놓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충분히 이해됐다. 내가 그들이라도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대신 내주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절묘하게 해결됐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게 있었다. 내가 전과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육체적으로 힘든 건 견디겠는데,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또 다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제주성안교회 손영호 목사님이 내 상황을 알아차리시고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목사님이 나를 교회에 데려가선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면서 “너는 반드시 훌륭한 목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83년 1월 20일, 나는 50명의 동기생 중에서 20명밖에 남지 않은 졸업생에 끼였다. 입학 때 어느 누구도 내가 졸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았지만 나는 해내고 말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상경을 단행했다. 주위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과감하게 차비만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제주도에서 정보를 얻은 대로 방배동의 백석신학대를 지원했다. 대학 측에서 내 차림새를 보고 등록금을 댈 수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걱정 없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자신감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등록금 미납자 명단에 내 이름은 항상 빠지지 않았다.
등록금도 문제지만 숙식을 해결하지 못해 막막했다. 기도에 매달리고 있던 중 다른 학생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학교 인근의 고물상에 머무를 수 있게 됐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록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