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8) 떼제공동체 ②찬양

입력 2012-05-06 18:01


인도자도 특송도 없는 단순한 찬양, 그러나 생명력이 넘친다

영혼을 울리는 찬양은 어떤 것일까? 예배가 하나님의 쉐키나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찬양은 그 쉐키나 속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이다. 우리의 영이 속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가슴을 적시는 임재의 예배가 아닐까? 그 가슴 절절한 예배를 단 한번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혼은 독수리 같이 날개 치며 하늘을 날 것이다.

떼제의 생명력은 예배에 있다. 하루 세 번 드리는 예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달려가고픈 거룩한 기대를 갖게 한다. 떼제 예배는 곧 찬양의 예배다. 예배 속에 찬양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곧 찬양이요, 찬양이 곧 예배다.

먼저 예배는 묵상적인 분위기가 담긴 찬양 한두 곡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시편을 찬양한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시편을 한 구절씩 읽거나 아니면 독창으로 노래한다. 그러면 모두가 “할렐루야”로 응답한다. 찬양하는 사이에 몇몇 사람이 촛불을 손에 들고 미리 준비된 등잔이나 촛대에 가서 불을 붙인다. 그 불은 침묵 가운데 타올라 그리스도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을 상기시킨다.

그런 다음 성경을 읽는다. 성경 구절은 주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짧고 쉬운 것으로 택한다. 말씀을 읽은 후 묵상의 노래를 하나 부른다. 그리고 침묵기도가 시작된다. 찬양은 침묵으로 이어지고 침묵은 찬양을 낳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몸을 맡기듯 침묵은 예배자를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한다. 침묵은 찬양을 깊게 하고 찬양은 침묵의 샘에서 더 맑아진다. 침묵은 곧 청원의 기도(혹은 중보기도)로 이어진다.

한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청원(중보)의 기도를 드리면(주로 수사들) 사람들은 “주여 들어 주소서”로 응답한다. 청원의 기도가 끝나면 사람들은 각자 마음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짧은 마음의 기도이다. 하나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들어 주소서” 등으로 응답한다.

우리 예배와 비교하면 떼제의 예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예배의 중심이 설교가 아니라 찬양이라는 것이다. 설교는 성경읽기와 침묵기도가 대신한다. 성경은 수사석 뒤편의 연단에서 읽고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그쪽으로 몸을 돌려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한다. 주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읽고 가끔 다른 나라의 언어로도 읽지만 본문은 그다지 길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의 양이 너무 많으면 충분히 묵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떼제 찬양은 떼제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톨릭 미사곡이 중후하지만 너무 무겁고 개신교 찬양은 자유스럽지만 조금 가벼운 느낌이 있는데, 떼제 찬양은 이 양 극단을 보완했다. 초기에는 프랑스 작곡가 자크 베르티에(Jaque Berthier)가 대부분을 작곡했다. 베르티에가 곡을 쓰면 공동체 안에서 먼저 불러 보고 익숙해지면 공식적인 찬양으로 올렸다고 한다. 떼제 찬양은 단순하다. 대부분 한두 소절의 반복이요, 내용은 물론 성경적이다. 찬양의 내용은 주로 ‘경배(adoration)’이다. 인간의 요구를 위한 찬양은 거의 없다. ‘키리에’ ‘할렐루야’ ‘글로리아’ 등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떼제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찬양을 지향한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인간을 위한’ 찬양에 익숙한 사람들은 순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에 잘 적응하지 못하지만 점차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체험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향해 직접 말하는 찬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떼제 찬양은 반복한다. 찬양을 반복하는 이유는 처음에 가사가 주로 프랑스어 라틴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도움을 줄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이 찬양에 도움이 되고 반복 자체가 찬양의 본질임을 알고 한 곡을 보통 대여섯 번 아니 스무 번 이상 부른다. 처음에는 진부하게 느끼지만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 가사의 내용이 화선지에 먹물이 배듯 심령에 배어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그것은 분명 여러 가지 다양한 찬양을 많이 불러야 좋은 찬양이라고 인식하는 우리의 찬양과는 다르다.

우리의 찬양은 가사가 갖는 깊은 영적 의미보다 찬양의 감성적 선율에 더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떼제 찬양은 기교가 없고 단순하다. 일체의 당김음, 가성도 없다. 선율은 서양의 이지적 선율도 아니며 동양의 구슬픈 가락도 아니다. 고도의 절제된 균형미와 축제의 기쁨이 배합된 노래로, 감성적 파토스(pathos)를 뛰어넘어 영혼을 해방시키는 깊은 영성의 경지에 이른다. 우리의 찬양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양된 감정, 자기 연출, 의도적 기획 등을 볼 수 없다. 소란스러운 악기 연주를 통해 공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물론 없다. 조용한 것이 반드시 경건한 것은 아니며, 시끄러운 것이 반드시 경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예배를 두 종류로 나눈다. 경건한 예배와 축제적인 예배다. 전통적인 예배는 경건성을 지향하고 현대적인 예배는 축제성을 지향한다. 두 예배의 차이는 예배신학의 차이는 물론, 하나님의 성품의 차이에서 나온다. 경건성을 지향하는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 즉 하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축제성을 지향하는 예배는 내재적인 하나님, 즉 우리와 가까이 함께하시고 친밀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나이 든 세대는 주로 경건성이 익숙하지만 젊은 세대는 축제성에 익숙하다. 그래서 교회마다 어떤 예배는 경건한 전통예배, 어떤 예배는 현대적인 축제예배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예배자들의 기호를 만족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에게는 유익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예배를 수요자 중심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닌가? 과연 예배자가 좋아하는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가 하나님께 무엇일까?

떼제 찬양은 특별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지휘자도 없고 앞에 나가서 특송을 부르는 사람도 없다. 청중을 감동시키는 특별 연주나 찬양자도 없다. 이름 있는 성악가의 특별출연도 물론 없다. 모든 회중이 십자가나 성화, 제단 쪽을 바라보고 함께 찬양하며 선창자도 회중 가운데 있다. 처음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인도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에 신기해한다. 찬양의 형태는 거의 유니송이고 대부분은 4부 합창 혹은 윤창으로 부른다. 물론 좋은 예배를 위해서 떼제는 매일 오후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찬양을 배우도록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만큼 잘 준비되고 기획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기획하면서 우리의 예배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예배의 영성보다 예배의 감성을, 모두의 예배보다 특별한 사람의 예배를, 예배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쉐키나보다 예배를 위한 인간적 준비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가? 한국교회 예배, 떼제가 한 대안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