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사유에 기대어 세월을 건너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입력 2012-05-04 18:03


고형렬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

올해로 문단 데뷔 33년을 맞은 고형렬(58·사진) 시인의 발자취는 ‘장자(莊子)’와 함께 한 세월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데뷔작이 1979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장자’이고 2010년 장시 ‘붕(鵬)새’를 펴냈으며 지난해엔 에세이집 ‘장자의 하늘, 시인의 하늘’에서 장자의 사유를 우리 시대 상황에 비추어 자유롭게 재해석하기도 했다.

그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원문으로는 20쪽이 채 안되는 ‘소요유’편은 붕(鵬)이라는 새가 구만리 창천에 날아올라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철학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안에 대붕우언(大鵬寓言)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붕(大鵬) 이야기는 우언(寓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언이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비유나 상징을 빌려 말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의를 암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화술을 일컫는다.

신작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실천문학사)에도 우언의 암시가 들끓는다. “공포의 세상에 왔다가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바람이 부는 나뭇가지 애채 위에 서서/ 한 번,/ 인사하고 포르릉 날아간다/ 이 새도 구차하지 않고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저 새는 분명 정지용 씨의 산새는 아니다/ 무시무시한 육체의 상처와 기억을 내장한 채/ 깃털 흩날리는 마지막 비명/ 현재 불황은 옛 상황보다 항상 위독하기 마련/ 생보다 밝고 아프고 더 생적인/ 죽음의 아침 햇살이,/ 다 해진 날개 밑의 바닥을 비춰준다/ 어떤 새도 사진기록과 보고서를 남기지 않는// 너희를 누가 꿰매놓은 것일까”(‘우리나라 새’ 전문)

장자의 대붕 이야기를 의식하고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우리나라 새’라는 제목으로 미뤄보건대 과연 고형렬의 ‘대붕우언’이라고 할 만하다. 애채(새로 돋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 번 지저귀고 날아간 새를 보면서 시인은 살아 있음 자체가 일종의 우화일 뿐,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인간과 만물의 본성과 숙명을 사색하고 있다. 시집에 수록된 108편의 시들을 더도 말고 하루에 한 편씩 음미하다 보면 고도로 응축된 사색의 진경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4년 전, 서울을 떠나 경기도 양평 갈지산 밑으로 이사 간 그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시란 무엇인가. 33년 써왔지만 나는 시의 불가지론을 믿는다. 이 부지(不知)가 시를 쓰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길을 모르고 걸어왔으니까 앞길도 모르고 걸어갈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