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시대 꿰뚫는 정론직필의 시선… ‘불확실 시대의 문학’
입력 2012-05-04 18:03
임헌영의 ‘불확실 시대의 문학’
모든 시대는 역사의 유령과 싸우는 한 철인지도 모른다. 21세기에는 20세기의 유령이 떠돈다. 그러니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자의식은 20세기의 유령이 없이는 불가능한 실감일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현실 전체가, 사소한 삶 낱낱이 역사와 정치권력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됨을 절감한다. 미학과 진리조차도 정치권력에 의해 날조당하는 시대, 그런데도 문학은 거대담론의 시대가 지났다고 국적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샴페인을 터트린 지가 얼마인가.”
문학평론가 임헌영(71·사진)씨가 18년 만에 낸 평론집 ‘불확실 시대의 문학’(한길사)에 붙인 소회이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이끈 주역이었다. 그렇게라도 한 시대를 정리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미래의 땅으로 옮겨갈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비평은 문학이 아니라 시대였다. ‘지구화와 한국문학’ ‘문학사와 그 주변’ ‘문학과 사회’ ‘비평 문학의 현장’ 등 모두 4부로 구성된 평론집에도 시대에 대한 비평이 여러 편 눈에 띈다. ‘4·19세대의 문화사적 의미’라는 제목의 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체 혁명사에서 ‘세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게는 혁명주도 세력에 속하는 연배를 뜻한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는 31세, 당통은 30세로 동년배였고 마라는 46세로 한 세대 위였지만 ‘혁명의 세대’였다고 해서 그리 어색할 게 없다. 아니 4·19혁명 참가자의 연배는 그보다 더 내려간다. 알려진 최연소 희생자는 수송초등학교 6년생 전한승, 고령자 참가 기록으로는 ‘마산의 할머니 데모대’, 여기에다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김영달(동국대) 등 교수 데모단 258명을 추가하면, 그 4월의 거리를 메웠던 국민 모두가 각자 ‘4·19세대’라고 한대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326쪽)
그는 문단에서 유독 부각되어온 ‘4·19 세대’라는 술어의 의미를 조목조목 따지며 ‘세대론’ 자체가 지닌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레드 콤플렉스 형성 과정’이라는 평문에서도 시대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읽힌다. “해마다 6·25를 전후하여 한국의 모든 영상매체들은 어쭙잖은 삼류 반공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필자는 첫 회만 보면 그 배역 가운데 누가 커서 한국군이 되고 다른 한쪽은 인민군이 될 것인지 금세 예견하여 집안 식구들을 놀라게 만들곤 한다.”(375쪽)
상식적인 시선으로 봐서 미남 탤런트는 반드시 한국군이 되고, 그보다 조금 떨어진 경우에는 인민군이 된다는 이 지극히 간단한 드라마의 비밀은 바로 레드 콤플렉스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문열의 ‘영웅시대’, 이병주의 ‘지리산’, 최인훈의 ‘광장’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인간미를 가진 낭만적 사회주의자들이지만 결말은 다 파멸로 끝나고 만다는 데서 거의 모든 분단 소재 소설들은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고 그는 분석한다.
“말을 바꾸면 인간미를 가지고 있는 한 사회주의적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도 들리는 이 일련의 흐름은 그 예술적인 성취의 성패를 가릴 것 없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노라면 사회주의는 비인간화, 자본주의는 인간화라는 흑백논리의 연장선에 다름 아닐 것이다.”(383쪽)
모든 시대마다 역사의 유령이 떠돌지만 임헌영 만큼 유령을 잘 보는 사람은 드물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