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⑬ 기억의 변주와 설화적 재생… 시인 김근
입력 2012-05-04 18:05
태몽을 새롭게 꾸민 서사의 힘
토속과 현대가 충돌해 내는 파열음
김근(39) 시인은 질마재 신화의 땅인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증조부모가 다 살아계셨다. 외할아버지가 양자를 가서 외증조모가 두 분이었고 할머니의 친정어머니는 백 살이 넘도록 사셨다. 그들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는 원색의 민화 같았고 설화적 유즙의 맛을 풍겼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태몽을 꾸었다고 어머니가 전해주었지만 그저 꿈에서 닭이 노닥거렸다고 말할 뿐, 구체적으로 들은 바 없다. 그는 태몽을 이렇게도 꾸미고 저렇게도 꾸미기 시작한다. 태몽의 변주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머니는 유산을 자주 하셨는데, 나를 낳기 전에 세 번이나 유산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내가 태어난 이후로도 몇 번 유산을 하셨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그 얘길 듣고 자랐는데, 어쩌면 나도 그렇게 사라질 존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열여덟 살 김근은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다가 잠시 앞산의 하늘이 반짝 개인 것을 보고 그쪽으로 달려간다. 그곳은 마을 앞 커다란 저수지였다. 장마철이라서 물을 모두 뺀 저수지 바닥에 오래된 마을이 드러나 있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담벼락과 장독대, 우물, 고인돌 같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이 자신의 과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집으로 달려가 시를 써내려갔다.
“항아리 같은 잠의 뚜껑을 열고 사내애는 깨어났다. 낡고 낡은 잠 바깥엔 삼백예순 날 종일 비 내리고 빗방울 하나마다 부릅뜬 눈알들 추녀 끝 마당엔 여자가 온몸으로 눈알을 맞고 서 있었다. 여자는 희게 젖고, 엄마 나는 저 눈깔들이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단다. 얘야. 지느러미나 혓바닥이 내릴 날 있을 거다. 저것들은 엄마가 죽인 아이들의 눈깔인가요? 얘야 저것들은 네가 무수한 날에 바꿔 달 눈알들이란다.”(‘어제’ 부분)
어느샌가 꾸며낸 태몽과 이제는 사라져 오직 시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저수지 바닥의 오래된 마을과 집들…. 그에게 사라지고 없는 것들은 시를 이끌어내는 모체이자 신화로 변주된다. 신화의 터전에서 뻗어 나온 시가 언어의 몸을 얻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그에게 오래된 것들이란 기억 이전의 것이다. 그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현재의 시제로 불러들여 새로운 옷을 입혀주고 있다. 오래된 것은 그가 언어 렌즈에 끼우는 일종의 필터인 셈이다. 이제 김근은 옛 왕들의 필경사를 자처하기에 이른다.
“선왕께서 한날은, 비로소 봄!이라 하시매, 비로소 봄!이라 적었나니,/ 궁궐의 나무란 나무는 모도 꽃 필 자리에 종기를 매달고 곪고 곪다가/ 끝내는 툭, 툭, 터져 피고름 온통 질질질 낭자하고 궐 안이 썩은 내로/ 진동하였으니 어린 내시들의 성기 모조리 잘리고 어린 무수리들/ 모조리 처녀를 잃고 꼬부랑꼬부랑 하루아침에 늙은 뒤였더이다”(‘분서(焚書) 3’ 부분)
김근은 ‘선왕’으로 상징되는 지배 언어에 의해 구축된 문화 질서 이면에, 시공을 초월한 어떤 근원적인 배후가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 배후란 억압될 수도 없고, 억압되어서도 안 되는 어떤 ‘실재’의 존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는 모든 공식적인 문자들이 억압하고 있는 또 다른 말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 세계는 왕이 뱉어낸 말의 세계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이 연작시에서 등장하는 ‘필경사’라는 직업이야말로 말의 주술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본래 의미에서의 시인의 역할을 환기하고 있다. 김근은 고창의 촌 동네에서 생래적으로 체득한 신화적 상상력에 기초해 토속적 세계와 현대의 기형적인 실존을 충돌시키고 있는 것이다.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깨어난 사내애가 선왕의 필경사를 거쳐 이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