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하나님을 열애하라’] 하나님을 사랑 안하는 조선 신자에 탄식
입력 2012-05-03 18:32
‘하나님을 열애하라’ (주기철, 월간 ‘설교’ 1938년 3월호 게재)
‘하나님을 열애하라(원제 ‘하느님을 열애하라’)’는 주기철이 쓴 설교문으로 기독교잡지 ‘설교’에 실린 것이다. 이 설교문은 “나는 구약성경 중에서 특히 신명기와 시편을 좋아한다.”로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이 두 편이 하나님을 열애한 기록이며 하나님께 대한 깊은 정서의 발로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핍된 인간들을 통렬히 책망했다고 들려주며, 하나님을 열애하여 아버지라고 불렀던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강조한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하는 말씀처럼 예수는 첫째도 아버지의 영광이었고 십자가의 위험이 당장에 박두한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 인간들은 무지와 허망에 빠져 하나님을 모르고 거스리고 있다”고 지적하며 조선 교회를 비판한다. “조선 교회를 보매 그 교인된 동기, 그 신앙의 동기는 불순유치한 것이 많고 성심과 열애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극히 적도다. 주께서 당시에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향하여 ‘너희를 아노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마음에 없도다’(요 5:42) 하신 탄식은 오늘날 조선의 신자를 향한 탄식이 아닐 수 없다.”
주기철은 또다른 설교에서 한국인의 종교적 사명을 역설한다. “우리 조선 사람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경제 방면에 있는가? 아니다. 과학 방면에 있는가? 아직 보잘것없다. 그러면 우리의 천직(天職)은 어디 있는가? 확실히 종교 방면에 있다. 4000년 이래 하나님을 부르는 민족은 서(西)에 히브리인, 동(東)에 조선 사람인가 한다. 조선 기독교의 장래는 세계 사람이 주목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 사람아 이 거룩한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자.”
주기철은 189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안질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이 시기에 부흥사 김익두의 설교를 듣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여 192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초량교회와 문창교회에서 시무했으며 경남 노회장을 역임했다.
1936년 주기철은 오산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민족운동가 조만식의 요청을 받고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다.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하고 투쟁해온 주기철은 1938년 이후 다섯 차례 구속·수감되어 5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가 1944년 4월 21일 감옥 안에서 순교했다.
일본에서 상영된 주기철 일대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보고 크게 감명받은 일본인 목사 노데라 히로부미는 박사학위논문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국가권력’(고신대, 2009)에서 주기철의 순교는 “일본 국가와 교회의 역사에서 최대의 부끄러운 죄악”이라고 지적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 “주기철 목사의 행적을 통해 일본 교회가 배워야 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국가권력의 부당한 요구에 맞설 수 있는 저항정신이고 그 정신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이다.”
전 총신대 총장 김의환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한국 개신교의 장을 여는 밑거름이었다면,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한국 교회가 교회의 본래 신앙을 회복하도록 만든 밑거름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부길만 교수(동원대 광고편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