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9) AD 47년에 무슨 일이?
입력 2012-05-03 18:18
“반란 다시 일어난다”소문… 마가는 사업체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수리아의 안디옥에 모여든 성도들은 전도와 교육에 힘쓰며 비로소 크리스티아누스 즉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AD 47년 마침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3)
그리고 마가도 그들과 동행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 13:4∼5)
그들이 구브로를 선교 여행의 첫 목적지로 삼은 것은 그곳이 바나바가 태어난 곳이어서(행 4:36) 다른 낯선 곳보다 나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브로 즉 키프로스는 고대로부터 안디옥에 모여든 동방의 문물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관문이고 통로였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애굽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Ⅰ세는 구브로의 살라미 항구를 먼저 장악하여 이 동서 교역의 통로를 선점하고 흩어진 유대인들을 살라미에 정착하도록 했다. 구브로는 BC 37년 로마의 독립주가 되었다가 BC 22년 원로원의 속주로 되었다.
그러나 ‘마가라 하는 요한’은 왜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구브로에 간 것일까? 필자는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에서 AD 40년경 고향에 돌아온 마가가 6년간 부친의 사업을 복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설정했었다. 어느 정도 사업의 기반을 닦은 그가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 안디옥에 간 이유 중의 하나는 동서 교역의 중심인 그곳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다시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구브로에 간 것은 물론 외삼촌 바나바의 강권 때문이었을 것이나 또 한편 그도 지중해 진출을 위해 구브로를 답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행 13:6)
수리아와 길리기아 사이를 헤엄쳐 지중해로 나가는 물고기처럼 생긴 구브로 섬의 동쪽 항구 살라미에서 시작된 도로는 서쪽 끝의 바보 즉 파포스까지 이어진다. 동방의 문물을 끌어모은 살라미의 번영은 점차 지중해를 바라보는 파포스 쪽으로 옮겨졌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파포스 앞 바다의 물거품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파포스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 사울은 그곳에서 전도를 방해하는 유대인 마술사 엘루마를 제압하여 눈이 멀게 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로 자신의 이름을 총독과 같은 바울로 바꾼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버가에 이르니”(행 13:13)
그러나 마가는 그 버가 즉 페르게에서 일행과 헤어진다.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왜 마가는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 어떤 이들은 그가 힘든 선교 여행을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려워서였다고 하나 살라미에서 바보까지의 선교 활동에는 어떠한 방해나 핍박도 없었다. 또 일부 학자들은 버가에 내린 바울과 바나바가 험한 산악지대를 거쳐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가려했기 때문에 마가는 그것을 겁내어 돌아갔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미 30대 중반이 된 마가가 그것 때문에 돌아갔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그 때 예루살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AD 44년 아그립바 Ⅰ세가 죽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당시 17세였던 아그립바 Ⅱ세로 하여금 그 부친의 자리를 잇게 하고 쿠스피우스 파두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두스 총독의 재임 기간에 유대에서는 무서운 기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튜다스라는 마술사가 나타나 기근에 지친 민심을 현혹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다. 계속되는 기근으로 거칠어져가던 민심이 점차 로마에 대한 반감과 불만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자 파두스 총독은 튜다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결국 로마에 대한 반란 세력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총독은 기병대를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학살하고, 생포한 튜다스를 참수하여 그 목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5)
AD 46년 황제는 파두스 총독을 해임하고 유대인 출신의 티베리우스 알렉산더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재임 기간에도 기근은 계속되었고,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바로 그 때에 다시 고개를 든 것이 AD 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열심당 세력이었다. 당시 주동자 ‘갈릴리 유다’를 비롯해 2000명이 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나 그들은 다시 AD 29년 빌라도 총독 때의 초막절에도 나사렛 예수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자기들끼리 예루살렘에서 거사를 했다가 실패했다.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눅 13:1)
AD 47년이 되자 40년전 당시 반란을 주도했던 ‘갈릴리 유다’의 세 아들 야메스와 시몬 그리고 마나헴이 다시 열심당 인원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버가에 도착해 그런 정보를 입수한 마가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일구어 온 생산 시설과 판매망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벌여 놓은 사업들을 그러한 사태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업장들을 챙기고 있는 동안 열심당의 반란 계획은 탄로되었다. 유다의 아들들 중 야메스와 시몬이 잡혀 처형되고, 마나헴만 도주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알렉산더 총독은 유다의 아들들인 야메스와 시몬을 십자가에 달아 처형시켰다.”(‘유대고대사’ 20-5)
그러나 유대인의 반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AD 48년 알렉산더와 교체되어 쿠마누스 총독이 부임해 왔을 때 다시 유명한 ‘방귀 사건’이 터졌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다가오자 각지에서 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쿠마누스 총독은 다시 폭동 사태를 염려하여 병력 1개 연대를 성전에 배치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4일째 되는 날 한 병사가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드러내며 방귀를 뀌는 장난을 펼쳤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이 일어나 총독을 비난하며 시위를 계속하자 총독은 로마 군대를 안토니아 망대에 집결시켰다. 로마군의 학살이 시작되는 것으로 안 유대인들이 일제히 도망치다가 서로 부딪혀 넘어지며 압사를 당했다.
“이 소란 때문에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유대고대사’ 20-5)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갈릴리 사람들이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다가 그곳 사람들과 충돌하여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쿠마누스 총독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자 갈릴리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함께 사마리아를 공격했다. 이에 쿠마누스 총독은 보병 4개 연대와 사마리아인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살해했다.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수리아 총독 콰드라투스에게 호소하자 콰드라투스는 쿠마누스 총독을 유대인 대표, 사마리아 대표와 함께 로마에 보내 황제의 심판을 받게 했다. 마침 당시 로마에 가 있던 아그립바 Ⅱ세가 황후 아그리피나를 만났고, 황제는 황후의 의견을 따라 사마리아 대표들을 처형하고 쿠마누스를 해임시켰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라스의 형제 벨릭스를 유대 총독으로 파견하였다.”(‘유대고대사’ 20-6)
팔라스는 클라우디우스의 모친 안토니아의 심복이었고, 또 아그리피나의 측근이기도 했다. 그런 팔라스의 형제 벨릭스가 총독으로 부임해 오자 유대의 폭동 사태는 겨우 진정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란과 폭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가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공들여 이룩해 놓은 모든 생산 설비와 판매망들을 돌보고 챙기는 한편 그것들을 다시 정비하는데 힘썼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마가는 다시 안디옥으로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 시작한 일들을 다지고 확충하는 한편 이미 답사해 둔 살라미와 파포스를 통해 장차 지중해의 모든 지역으로 사업망을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