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5) 사라봉에서의 자살 미수 “그래, 주님 품에 안기자”

입력 2012-05-03 18:20


1976년 6월, 원양어선 선원 생활을 하던 나는 일본 교토의 새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졸지에 범죄자로 전락했다. 일본의 수용소를 거쳐 한국으로 송환된 나는 구치소에 갇힌 채 수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갖은 가혹행위와 언어폭력을 행사하며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으로 강요했다. 나중엔 그들이 쓴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쓰라고 하고선 강제로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오랫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구치소에서 국선변호사를 소개해 주었지만 그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나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해 2심에서 밀항법 위반죄로 3년형을 받았다. 상고까지 했지만 기각 당했다.

교도소로 이감된 나는 억울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상을 향한 한탄과 원망에다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달랠 길 없었다. 거기다 교도소 안에서 자행되는 갖은 핍박은 내 심령을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당시 재소자들을 상대로 시행된 순화교육은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내 육신에 골병을 들였다.

그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대놓고 울 수도 없는 처지였던 나는 속으로 끝없이 울었다. 지독하게 모진 내 인생을 생각하면 울지 않고는 못 배겼다. 하지만 그 처절했던 순간에 나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위로한다고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하나님은 나같이 피폐하고 쓸모없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신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당시 내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그 분은 부산 이사벨여고 유금종 이사장님이다.

나는 예수를 영접했다. 교도소에서 죽을 수도 있는 몸, 예수나 믿고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부터 나는 여러모로 달라졌다. 성경을 읽으면 힘이 나는 듯했다. 교도소 안에서의 기독교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해 찬송하고 기도했다.

모범 재소자로 지목돼 가끔 교도소 밖으로 나와 일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병든 몸이 한결 회복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위로를 느끼자 교도소 생활이 예전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깊이 병든 몸이라서인지 밤마다 통증과 신경쇠약으로 신음과 헛소리를 했다.

1980년 10월 2일,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다시 고향인 제주도로 향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예전에 알던 사람을 몇 명 만났는데, 반기기커녕 못 볼 걸 본 것처럼 불쾌한 기색으로 피하기 바빴다. 안 그래도 밑바닥을 헤맨 내가 전과자까지 됐다는 소문이 난 마당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가끔 인적이 없는 해변을 찾아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거세게 밀려드는 소외감과 우울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 죽자. 나 같은 놈은 살 가치도 이유도 없어.’ 자살을 결심한 나는 사라봉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자살을 결행한 듯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글귀가 새겨진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두 눈을 꼭 감고 밑으로 뛰어내렸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온 몸이 결리고 아팠지만 나는 생생하게 살아서 자살방지용 스티로폼 위에 누워 있었다. 참으로 끈질긴 생명이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뜻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근만근인 몸을 질질 끌고 어릴 때 살았던 고아원을 향했다. 그런 중에 자연스럽게 ‘그래 교회에 가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