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시인세계 시인 12명이 쓴 ‘나의 아버지, 어머니’ 특집
입력 2012-05-02 19:29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하늘이던 아버지가 땅이 되었다// 땅은 나의 아버지// 하산하는 길에 발이 오그라들었다// 신발을 신고 땅을 밟는 일/ 발톱 저리게 황망하다// 자갈에 부딪혀도 피가 당긴다”(‘아버지의 빛’ 전문)
신달자(69) 시인은 아버지를 묻고 돌아서면서 아버지를 밟고 걷는 게 아니냐는 죄책감 때문에 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짧은 산문으로 이어진다.
“그때 가장 왕성했던 나의 기도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나는 아버지를 모실 수 없었고 노인병원에서 특별해야 할 내 아버지가 다른 노인들과 바보 인간을 연출하는 것을 도저히 내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이것이 이기심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중략) 밥 먹듯 하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 1997년이었다.”
그 기도처럼 자신이 다른 세상으로 아버지를 떠밀어버린 것 같아서 “하늘의 손이 내 머리를 꽝 쥐어박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아버지가 가시며 자신의 꽉 막혔던 시의 눈을 뜨게 했다고 말했다. 연작시 ‘아버지의 빛’ 10편이 그렇게 태어났다.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는 2012년 여름호에 기획특집 ‘시인이 쓴 나의 아버지, 어머니’를 실었다. 신 시인을 비롯해 김종길 문정희 감태준 등 국내 원로·중진 시인 12명이 부모에 대해 쓴 시와 짧은 산문을 담았다.
김종길(86) 시인은 아버지를 회상하며 20대 후반에 쓴 시 ‘성탄제’를 불러온다. 김 시인은 열이 펄펄 끓는 아들을 위해 눈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 온 아버지를 회상한다. 또 파산 지경에도 자신을 학교에 보냈던 아버지에 대해 “일찍 어머니를 여읜 나에게는 남다른 아버지”였다고 고백한다.
문정희(65) 시인은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네가 제일 이쁘다”고 치켜세우던 말이 생각난다고 회상한다. “어렸을 때 대낮에 대숲에다 흙으로 지은 측간에 갈 때에도 어머니는 등불을 켜들고 상궁나인처럼 따라왔다. 공주의 행차처럼 나는 응아를 했고 부드러운 쑥잎을 골라 뒤를 닦아주며 사방에 쑥향기가 퍼지게 했다.”
감태준(65) 시인은 1970년대 유신 체제 속 민주화 투쟁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던 시절 서울 내자동 허름한 뒷골목에서 읊은 ‘사모곡’을 떠올린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달이 되어 자신을 지켜준다고 노래한 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시인은 여전히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총론을 쓴 문학평론가 엄경희씨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라는 존재의 있음(Being)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점에서 생의 충족감의 원천이자 궁극적 결핍감의 원천”이라며 “사랑과 행복, 불화와 연민, 후회, 회한 등 다양한 관계 체험이 처음 시작되는 지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