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4) 18세 야쿠자서 살인미수범까지 ‘고난의 굴레’
입력 2012-05-02 18:37
많은 사람들은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일본의 야쿠자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는 폭력조직이다. 나는 18세에 당시 최연소 야쿠자 조직원이 돼 온갖 몹쓸 짓을 했다. 때로는 험악하고 잔인한 행동도 불사했다. 조직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한심한 나의 아픈 과거다. 여기서는 세세하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야쿠자의 말단 조직원 생활을 하면 감옥소를 드나들기 십상이다. 나도 얼마간 활동을 하던 중 오사카 경찰에 잡혀 들어갔다. 수갑에 채워져 여기저기 끌려 다니던 나는 나가사키의 오므라 수용소로 보내졌다. 한국 국적의 나는 강제송환 결정을 받았다. 일본의 순시선을 타고 부산으로 실려간 나는 부산소년원을 거쳐 풀려났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한동안 부랑아처럼 부산시내 거리를 떠돌았다. 내가 갈 곳은 역시 고향인 제주도밖에 없었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상태에서 몰래 여객선을 탔다. 제주항에 도착해 들통이 나는 바람에 나는 매로 배삯을 대신한 다음 배 청소를 하고서야 배에서 내렸다.
이때부터 내 인생은 한동안 공백기를 맞았다. 마땅히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떠돌다 배가 고프면 아무 일이나 하면서 허기를 메우며 지냈다. 그런 가운데서 일본에서 당한 일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특히 나를 심하게 구박한 새어머니를 생각하면 강한 복수심이 일어나며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군에 가면 먹고 자고 하는 건 해결된다는 말을 듣고 공군에 지원해 군생활을 마쳤다.
군에서 제대하자 나도 어느덧 20대 중반의 청년이 돼 있었다. 계속 길거리를 떠돌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뭔가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배운 것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방을 둘러봐도 어느 누구 상의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중에 배를 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풍문을 접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원양어선을 탈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 ‘만약 일본에 가게 되면 새어머니를 찾아가 보복을 해야지.’
30개월 계약으로 나는 인도양으로 나갔다. 배에서 지내는 생활은 말 그대로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가끔 폭풍우라도 치는 날이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거기다 거친 선원들 사이에서 살벌한 싸움도 더러 일어났다. 가끔 선상에서 죽는 사람도 나왔다. 알고 보니 육지에서 사고를 치고 도피하기 위해 배를 탄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건 아니더라도 갈 데까지 간, 그야말로 인생 막장까지 간 이들이 많았다.
적어도 15개국의 항구를 거치면서 참치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졌다. 배에 화재가 난 것이다. 우리는 항해 중 배에 불이 나면 거의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 가운데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 출항하기 전 제주도에서 아는 할머니가 꼭 품고 가라고 전해준 포켓성경이었다. 나는 선실에 던져놓은 작은 성경책을 찾아 들고 갑판으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어렵사리 불길을 잡아 승무원 전원이 무사했다. 우리를 태운 배는 수리를 하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 스미스항에 정박했다.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도쿄로 가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갔다. 전혀 뜻밖에 찾아온 나를 보자 새어머니는 겁에 질렸다. 그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경찰에 알렸다. 그런데 그 일이 나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졸지에 내가 살인미수범이 된 것이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