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한뭉치 무화과
입력 2012-05-01 15:33
한뭉치 무화과/신성학 지음/토기장이
책 제목 ‘한 뭉치 무화과’는 이사야서 38장 21절에 나온다.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한 뭉치 무화과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의 상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이 그 속에서 역사 할 때, 그것은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을 소생시키는 능력의 도구가 되었다. 한 뭉치 무화과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기적과 신비, 치유와 회복의 상징이다.
이 책은 한 뭉치 무화과와 같이 주님의 도구로 쓰이기를 바라는 저자 신성학(50) 선교사의 하나님 동행기다.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밥퍼 목사’로 알려져 있다. 거리전도 찬양집회를 통해 헝가리 노숙인들을 먹였으며 유럽 전역에 흩어진 집시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했다. 세계 최초의 집시인을 위한 신앙과 교육의 장인 ‘유럽집시비전센터’도 개관했다.
저자는 성악가였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오스트리아 빈 음악가협회 성악가와 오페라과정을 수학한 후 독창회와 다양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유학당시 음악가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헝가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서원으로 일찍부터 목사가 될 것을 작정한 신 선교사는 30을 훌쩍 넘긴 나이에 결단, 감리교 협성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안수를 받은 그는 12년 전 감리교 파송 헝가리 선교사로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그는 헝가리 음악가들과의 교제를 통해 테마가 있는 다양한 음악회를 열면서 헝가리 상류층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다음날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하러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도중 수많은 노숙자들을 보았다. 버스 정류장과 지하도 마다 노숙자들이 그득했다.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이후 밥 먹을 때도, 잠 잘 때도 노숙인들이 어른거렸다. 음악을 통해 상류층 전도를 꿈꿨던 자신들의 계획을 접었다. 대신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들고 부다페스트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매일 찾아갔다. 처음 20개로 시작한 샌드위치 사역은 40개로, 80개로, 130개로 점차 늘어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빵과 국을 나눠 먹이자 사람들이 모였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 그것은 부다페스트에서 펼쳐진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신 선교사 부부는 ‘헝가리의 복음 나팔수’로 자신들을 드리기로 헌신했다. 이들은 노숙인들이 가장 많은 부다페스트 서부역 등을 중심으로 거리 찬양을 했다. 아내는 반주를, 남편은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신학대학 종교음악과 교수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신 선교사 부부가 부다페스트의 노숙인들을 위해서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들은 거리집회를 통해 전도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케젤렘교회를 개척했다. 헝가리 내 한인들을 위한 부다페스트한인은혜교회도 개척했다. 집시들을 대상으로도 사역하기 시작했다. 지경은 넓혀져 갔다. 무관심했던 헝가리인들도 점차 이들 부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 선교사의 사역 스토리는 헝가리 국영방송과 네덜란드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처음 헝가리에 도착해서부터 이들은 낯선 곳의 음식과 언어, 향수병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점차 낯설음이 편안함으로, 불편함이 행복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책 도처에는 ‘사명의 자리’에 선자만이 느끼는 평안의 메시지가 있다.
신 선교사는 거리 전도 찬양집회가 헝가리는 물론 유럽에서 효과적인 전도 사역이라고 믿는다. 유럽인들은 음악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찬양을 부르면 관심을 보인다.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행했을 때에 결국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거리에서 그는 예수님의 손길을 경험했다.
신 선교사는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제목의 음반을 냈다. 가사가 이들의 고백이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강에서/주께 사랑드립니다.’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