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마음의 지도

입력 2012-04-30 18:22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텃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에 온 몸이 근질거린다. 유학생활 동안 나는 텃밭을 가꾸며 살 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누린 적이 있다. 존경하는 사모님(안사람에 대한 최고의 경칭)께서 게렛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교회에 파송을 받아 목회를 시작할 때 우리가족은 시카고 인근의 엘진이란 소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100년이 넘은 미국교회의 사택은 넓은 잔디 마당이 있는 80년 된 고택이었다. 박사논문을 쓰며 잠시 한인 목회를 접고 이곳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나는 밤낮으로 쌓이는 논문 스트레스를 무언가로 잊고 싶었다. 이 때 생각한 것이 마당 한쪽 잔디를 걷어내고 텃밭을 가꾸는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미국교회 교인들은 너그럽게 사부님(여자목사의 배우자 호칭을 한국에선 그렇게 부른다고 일러 주었다)의 소원을 받들어 스무 평은 족히 될 만한 널찍한 공간에 잔디를 걷어내고 거름을 쏟고 이랑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텃밭 이랑마다에 온갖 종류의 한국산 채소 씨들을 다 뿌리고 둘레에는 토마토, 고추, 가지 등의 묘목을 심었다. 채소 박물관을 꾸민 것이다.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텃밭에 나가 싹터오는 새순들을 바라보고 잡초도 뽑아주고 열심히 물주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한나절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뿌듯한 충만감을 느끼며 잡념이나 유학생활의 권태와 스트레스가 어느새 사라지곤 했다. 이 텃밭일구기는 흙을 만진다는 것이 참 치유적이며 행복한 일임을 깨닫게 해준 값진 경험이었다.

흙은 참 정직하게 보답한다. 그 해 여름 나는 내가 아는 모든 한인가정들에 채소 배달부가 되었다. 흙은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을 체험적으로 가르쳐 준다. 잠시만 소홀해도 많은 잡초들로 텃밭의 이랑이 보이지 않고 파종과 수확의 때를 놓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게도 만든다. 몇 해 동안의 텃밭 체험으로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마음도 흙과 비슷하다는 것을 값지게 배울 수 있었다.

인도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주 먼 옛날, 처음 인간들은 신들의 세상에서 신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물론 신의 속성을 지닌 채. 그런데 이 처음 인간들이 워낙 꾀와 장난기가 많아 점잖고 조용한 신들의 세상에 늘 말썽을 피우는 주역들이 되었다. 하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이 회의를 열어 결국은 인간들을 신들의 세계에서 추방키로 결정했다. 문제는 추방될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신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추방당하는 말썽꾸러기 인간들에게서 신의 속성을 빼앗아 저 높은 산위에, 저 달 위에, 혹은 저 바다 깊은 곳에 감춰놓자는 모든 의견들이 인간의 영악함과 꾀돌이 지혜가 곧 찾아내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 부딪쳐 격론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한 신이 제안했다. 인간들은 워낙 약고 지혜로운 척해서 빼앗긴 신성을 항상 저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찾을 것이니, 그 빼앗은 신성을 그들 마음속 깊이 숨겨놓고 추방하자. 그러면 인간들은 차마 그 고귀한 신성이 그들 마음속에 깃들인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마침내 이 주장이 채택돼 인간은 그 신성을 빼앗겨 마음 속 깊숙이 숨겨진 채로 이 땅으로 추방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우리들 마음 밭 깊숙이에는 놀라운 신성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교훈이리라.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마음 밭은 돌보지 않고 저 밖 어느 곳에 신성이 감춰지기라도 한 듯 눈을 잠시도 쉬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텃밭을 가꾸며 마음으로 향하는 지도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배웠다. 저 밖, 저 어디에 내 마음의 주인, 하늘의 보물이 깃들인 것이 아니라 내가 차마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던 내 마음 밭 깊숙이에 그 보물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흙을 만지며, 호흡을 느끼며, 몸으로 흐르는 땀방울의 느낌을 느끼며, 마음을 단순하게 할 때 느낄 수 있었다.

바쁘다며 돌보지 않는 텃밭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밭의 골과 이랑의 흔적이 보이지 않듯, 삶의 번잡함으로 인해 내 마음으로 들어가는 단순한 그 순간들을 잃고 있을 때, 우리도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 마음의 지도를 잃고 말 것이라는 그 값진 교훈을 나는 텃밭을 일구며 배웠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