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메이플라워호의 강력한 지도자 월리엄 브래드포드 (下)

입력 2012-04-30 18:28


기적의 항해-험란한 정착… 신대륙에 미국탄생 씨앗을 심다

메이플라워호에는 라이덴의 교인들만 탄 것이 아니었다. 모험 조합에서 보낸 이방인들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선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좋으나 싫으나 5000㎞에 가까운 항해를 함께 해야 했다. 항해는 고통 그 자체였다. 멀미도 멀미지만, 좁은 배에서 오랜 시간 항해에 시달리다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노련한 선원도 감당하기 어려운 항해였다. 실제로 제일 먼저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젊은 선원이었다. 그 선원은 멀미에 시달리던 라이덴 교인들을 비웃고 놀려댔지만, 결국 자신도 고된 항해를 견뎌내지 못했다.

항해 중 가장 무서운 일은 폭풍우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항해에서 폭풍우를 피해 가기란 어려웠다. 선장 존스는 강한 서풍과 높은 파도에 맞서 싸워야 했다. 바람이 너무 강해 거대한 파도가 선박을 계속해서 덮쳤다. 그는 ‘라이 아훌’(lie ahull)을 감행해야 했다. 라이 아훌은 돛을 완전히 걷고 갑판 위의 모든 것을 단단히 묶은 다음, 180t짜리 배를 그냥 성난 바다와 바람에 맡기는 것이었다. 이제 배는 인간의 손을 떠난 것이었다. 이제 기댈 것은 하나님의 자비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다의 공포는 너무 가혹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메이플라워호는 폭풍우 치는 그 거친 바다에서 마치 오리처럼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메이플라워호는 상선이라 널빤지 모양의 상갑판이 배의 균형을 잡았던 것이다. 그들이 포기했던 날렵한 배 스피드웰호였다면 아마 침몰하고 말았을 것이다.

고통스런 항해가 끝난 뒤, 그들은 드디어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신세계였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그곳은 환영해 줄 사람 하나 없고, 언제 인디언의 습격이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 설렐 수밖에 없었다. 낯설지만 모든 것이 풍부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항해에는 마지막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의 목적지인 허드슨강 하구의 버지니아를 향해 가다 모래톱에 얹혀 좌초될 뻔했다. 바람의 도움으로 모래톱에 빠져 나온 그들은 결국 목적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케이프 코드 안쪽에 있는 프로빈스타운에 배를 정착시켰다. 오랜 항해에 지친 그들은 빨리 육지에 내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신대륙에 내리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신대륙은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개척과 정착 과정에서 갈등과 싸움이 벌어져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종종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곤 했다. 메이플라워호의 승객들은 그런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다. 함께 정착지를 개척하려면 라이덴의 교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힘을 합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약을 만들었다. 브래드포드를 비롯한 41명의 모든 성인 남성이 서약에 서명을 했다. 너무 허약해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X자로 표시했다. 그들이 서약한 이 문서가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 서약(The Mayflower Compact)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계획했고, 개척지에서 질서와 유지, 위의 목적의 촉진을 위해서 하나님과 서로의 앞에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체제를 결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서약과 동시에 그들은 정착지의 초대 총독으로 존 카버를 선출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다시 아메리카로 신앙을 찾아 떠난 사람들, 즉 순례자라는 뜻의 필그림 파더스가 아메리카에 첫발을 내디뎠다. 브래드포드는 아메리카에 첫발을 디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두 무릎을 꿇어 거친 대양에서 배를 인도하시고 모든 위험과 고난에서 구원하시며 다시 단단하고 안전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프로빈스타운 항구는 그들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땅이 너무 척박했다. 정착할 만한 곳을 찾으려 탐사대가 꾸려졌다. 브래드포드는 탐사대에 자원했다. 탐사대는 도보와 보트로 세 번의 탐사를 한 끝에 최종적으로 오늘날의 플리머스항을 거주지로 선택했다. 그는 탐험대와 함께 거주지를 찾았다는 희소식을 전하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아내 도로시가 배에서 미끌어져 익사한 것이었다. 그녀가 힘겨운 항해 끝에 도착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두고 온 아들 생각에 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브래드포드는 슬픔을 안고 플리머스로 향했다.

플리머스에 정착하고 나서 필그림들은 인디언이 공격해 올까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포카노케트 부족이 살던 지역이었다. 그들이 공포스럽게 생각했던 인디언들은 생각보다 훨씬 평화적이었다. 1621년 3월 16일에 그들은 인디언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인디언들 중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초대 총독 존 카버는 영어를 하는 인디언 스콴토의 도움을 받아 포카노케트족의 추장 마사소이트와 서로 공격을 하지 않고 다른 부족의 침략을 받을 때에는 서로 돕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옥수수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 1621년 4월에 초대 총독 카버가 갑작스런 두통을 호소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사망했다. 카버의 죽음은 필그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그러나 정착지의 안정을 위해서 새로운 총독을 서둘러 뽑아야 했다. 그들이 선출한 사람은 당연히 브래드포드였다. 그는 당시 병석에 있었지만, 중책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세 차례나 총독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다른 인디언 부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요새를 구축했다. 인디언들의 공격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인디언 부족들과 협정을 추진했다. 그는 동부 인디언 부족인 나우세트족에 사람을 보내 평화협정을 맺었다. 협상에 응하지 않고 필그림들과 그들에게 우호족인 인디언 부족을 괴롭히던 인디언 부족은 무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

브래드포드는 플리머스에 정착한 이래 처음으로 곡식을 수확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항상 식민지 정착의 목적이 신앙공동체 형성이라고 생각했다. 총독인 그는 정착지를 독점 소유할 수 있었지만, 정착민과 소유권을 나누었다. 이렇게 한 까닭은 신앙심 깊고 결속력 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바람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바람은 총독으로 일을 하면서 꼼꼼하게 기록한 그의 책 ‘플리머스의 식민 정착에 관하여’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책은 1621년에서 1646년까지의 식민지 건설과 필그림들의 개척적 삶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전형적인 청교도답게 일상생활을 성경의 사건과 대비해 기록해 놓았다. 그의 이 책은 미국 역사와 문학의 시조처럼 여겨진다.

여러 어려움도 있었지만 브래드포드의 노력으로 식민지 정착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민지가 번성하고, 유럽 이주자에 의한 정착촌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그의 바람과 달리 도시들은 탐욕스럽게 변해갔다. 그는 정착지를 다시 영적으로 부흥시키지 못하면 총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선언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슬픔 속에서 노년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아들도 뒤로 하고, 아내를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 정착했는데, 이렇게 변질돼버렸다고 생각하니 무척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 속에서 기쁨을 찾았다. 말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깝게 느끼기 위해 히브리어 공부를 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 서투른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것이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같다고 썼다.

브래드포드는 자신이 꿈꾸었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1658년 5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필그림들은 성공적으로 아메리카에 정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을 화폐에 새겨넣은 미국인들은 미국의 탄생 신화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