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순철 (2) 고난 속 등대가 된 할머니의 찬송과 성경 이야기

입력 2012-04-30 18:17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한창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야 할 시기에 굶주림은 기본이고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특히 내 수양아버지라는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주먹이나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려 내 몸은 성할 날이 없었다.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혹여 동네에 소문이라도 날까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계속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매질에다 감금까지 당한다는 입소문이 번졌다. 급기야 그 소문은 고아원 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다시 고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때부터 나는 어른들만 보면 공포에 질려 피했다. 어른들에게 강한 적대감과 증오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고아원 선생님들이 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육신의 성장을 멈추고 감기와 천식,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어느덧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다행히 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하지만 배고픔의 고통은 오히려 더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원생들은 온종일 굶주린 이리떼처럼 벌건 눈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주로 곰팡이 핀 식빵이나 미군들이 사냥을 해서 안 먹고 버린 꿩 날개와 목을 주워서 구워 먹었다.

가끔 길거리에 버려진 사과껍질이라도 있으면 서로 주워 먹으려고 피 터지게 싸웠다. 그때 우리는 죽더라도 배 터지게 먹다 죽는 게 소원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우리는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웠다. 또래들보다 힘이 약했던 나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웠다. 그러면서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걸 마음 깊이 새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내 친할머니가 인근에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고아원 측에서는 안 그래도 왕따에다 문제투성이였던 나를 여든 살이 넘은 가난한 할머니에게 맡겼다. 졸지에 손자를 얻은 노약한 할머니는 나를 정성껏 보살폈다.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가 삭정이를 주워 불을 때 밥을 해 먹이고, 버려진 헌옷을 구해다가 수선해 입히셨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빠뜨릴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추운 겨울 밤 나를 꼭 껴안고 찬송가를 불러주시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며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등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예수 사랑하심은’ 등 몇몇 찬송가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하지만 내 얄궂은 운명은 가만있지 않았다. 할머니와 오순도순 살아가는 행복을 묵과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손발을 씻겨 달라고 하셨다. 수건을 물에 적셔 대충 보이는 부분만 닦아드리고 나니 이번엔 죽을 좀 달라고 하시기에 갖다 드렸다. 죽 그릇을 깨끗이 비우신 할머니는 “내가 이제 하늘나라로 갈 시간이 됐는데 어린 너를 두고 가는 발걸음이 무겁구나” 하시고는 “너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다” 라며 축복 말씀을 하신 다음 숨을 몰아쉬시며 운명하셨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됐다. 그리고 거지가 됐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마칠 나이에 여기저기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 밤이 되면 다리 밑에서 가마니를 덮고 잠을 청했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러던 중 서귀포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내가 있던 모슬포에서 70리 길을 걸어갔다. 낮에는 구두닦이 똘마니로, 밤에는 메밀묵과 찹쌀떡 장사를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가끔 나쁜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나쁜 길로 유혹을 했지만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해 참았다. 서러움이 밀려들면 할머니와 함께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달랬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