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용우] 극단의 시대

입력 2012-04-29 18:26


극단주의가 득세한다. 최소한 지난 22일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 투표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다. 이민 반대, 유럽연합 반대의 양 날개를 단 순혈적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극우파 민족전선의 후보 마린 르펜의 약진은 괄목할 만하다. 그녀가 얻은 17.9%의 득표율은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올랑드의 28.6%, 집권 여당인 대중운동당의 후보이자 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의 27.2%를 이어 3위다. 약 640만명의 프랑스 국민이 그녀를 지지했다는 뜻이자 전국 단위 선거 사상 민족전선이 일구어낸 최대 성과다.

르펜은 다음달 6일 실시될 결선투표에 참여할 수 없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1차 선거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없을 경우 1, 2위 후보가 2차 선거에서 우열을 가린다.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1위 올랑드가 10% 내외의 차이로 2위 사르코지에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지만 결과는 여전히 미지수다.

극우파 목소리 높이는 프랑스

사르코지의 입장에서 보면 르펜이 얻은 640만표를 어떻게 결선투표에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결정적이다. 그가 르펜의 지지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양팔을 걷고 나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르펜의 민족전선과 공식 연대를 구성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르펜 역시 지지자들에게 사르코지 지지를 권고하는 대신 투표 불참을 요구했다. 우파의 분열을 노려 자신과 민족전선이 새로운 우파임을 각인시키겠다는 심산이다.

사르코지는 극우파로 변신을 거듭한다. 르펜 지지자들의 호소를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민족전선이 공화국과 공존할 수 있다고 선언한 일은 놀랍기까지 하다. 물론 형식적인 측면에서 민족전선은 대선 후보를 배출하는 엄연한 프랑스의 공식 정당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프랑스의 주류 정치권에서는 민족전선과 같은 극우파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사르코지의 발언은 이런 전통과의 결별 선언이자 극우파의 주장이 주류 정치권 안으로 침투해가는 과정을 웅변한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좌파 언론들이 사르코지와 페탱 원수를 비교하고 나선 일은 과민 반응이 아니다. 페탱 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와 휴전 협정을 맺고 대독 협력을 추진했던 비시 정권의 수반이었다.

우파의 극단화는 위기감의 반영이다. 이제 많은 프랑스인들이 세계화와 유럽연합 앞에서, 다른 종교와 다른 피부색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이주민 앞에서 국가와 민족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여긴다. 높은 실업률의 원흉은 약 600만명에 달하는 이슬람계 이주민이라는 이들의 주장에 솔깃해진다.

복잡하게 얽힌 현실의 어려움을 자극적인 구호로 정리하고 특정 집단을 그 원흉으로 지목하는 일은 강한 매력을 발산한다. 모든 불행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던 히틀러와 나치즘을 지지했던 독일인의 경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페탱에 비견되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선에서 1차 투표는 마음으로 하고 2차 투표는 머리로 한다고 한다.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1차 투표에서 640만명의 유권자들이 르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나치즘의 가공할 폭력을 목도했던 20세기를 가리켜 한 역사가는 ‘극단의 시대’라 했다. 결선에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를 떠나 프랑스 대선은 극단의 시대의 유령이 아직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은 채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은 신호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호도할 희생양을 찾는 대신 극단이 뿌리내린 토양 자체를 도려내려는 노력만이 비극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상기시켜준다.

김용우 호모미그란스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