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의 심층은 모호함의 교환에 있다… 소설가 부희령의 첫 소설집 ‘꽃’
입력 2012-04-27 18:30
인간은 타인과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존재이지만 실은 무엇을 교환했는지 잘 모르는 모호성의 동물이다. 2001년 등단했지만 주로 번역가로 활동해온 소설가 부희령(48·사진)의 첫 소설집 ‘꽃’(자음과모음)의 수록작들을 읽으며 드는 상념이다. 부희령 소설들의 객관적 현실은 그악스럽고 비루하지만 주인공들은 그 속에 함몰되거나 그대로 끝나버리지 않으려는 분별력을 보여준다.
가령 가족이 있는 남자와 이혼녀와의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누구에게라도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객관적 상황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 통용될 수 없는 어떤 진심 때문에 심경은 복잡하다. “나중에 그가 휴대폰 번호 네 자리를 부인, 딸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X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아마도 아내와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하고 말끝을 흐리던 X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모호함이었을 것이다.”(‘화양’에서)
사실 X가 ‘나’를 사랑하는지도 모호하다. ‘나’ 역시 X에게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은 모호함을 교환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 암에 걸린 X가 방사선 치료실로 들어가면서 대학 시절에 가보았던 ‘화양’이라는 곳에 함께 가보자고 건네는 말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속으로는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정말 어딘가에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소녀가 여성으로서의 몸을 스스로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표제작 ‘꽃’도 모호함의 교환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성의 성기를 왜 꽃에 비유하는 것일까? 여성의 성기를 꽃에 비유하는 것은 오목한 생김새 때문일까? 여성의 성기는 꽃처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일까?”(‘꽃’에서)
섹스에 대한 남녀의 기대와 의미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 작품은 성관계라는 것이 성(性)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관계의 교환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나직하다.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주장하는 바가 없는 모호성과 애매함의 목소리가 오히려 신뢰를 준다. ‘작가의 말’도 나직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오후 같은 때에는 내가 쓴 소설들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보기도 한다. 물론 의미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내가 존재하듯이 내 소설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니까.”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