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진홍] 사슴 울음소리
입력 2012-04-27 17:55
제15대 대선을 통해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자가 탄생한 1997년 말,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은 신년휘호로 제심합력(齊心合力)을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한다’는 평이한 사자성어다. 이때 YS가 실제 채택하려 했던 휘호는 송무백열(松茂栢悅)이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또는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말로, 벗이 잘됨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소나무는 DJ, 측백나무는 본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DJ 당선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참모들이 반대해 발표되지 못하고 폐기됐다는 후문이다.
송무백열과 유사한 의미를 담은 말로 녹명(鹿鳴: 사슴의 울음소리)이 있다. 사슴은 여느 짐승들과 달리 맛있는 먹이를 발견하면 혼자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울음소리를 내 먹이를 찾지 못한 사슴들을 불러 함께 먹는다고 한다.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담겨 있다. 시경(詩經)에는 사슴무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풀을 뜯어먹는 광경을 어진 신하들과 임금이 함께 어울리는 것에 비유한 대목이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녹명이란 단어를 즐겨 쓴 사람이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다. 그는 2008년 4월 방통위원장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요즘 틈나면 눈을 감고 생각하는 단어가 있다”며 녹명을 거론했다. 그는 “나도 녹명 같은 울림을 내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것이 요즘 내 화두이고 내 생각의 전체”라며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후 그는 공직자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 등에서도 녹명을 강조했다.
청와대가 2008년 5월 서울대공원에서 사슴 3마리를 반입해 지금까지 청와대 경내를 돌아다니며 살도록 조치한 데에도 최 전 위원장의 녹명 발언이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최 전 위원장에게 26일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파이시티 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해 고향(경북 포항) 후배인 브로커로부터 8억원 가량을 받은 혐의다. 지난 1월 자신의 최측근이 비리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방통위원장 직에서 사퇴한 데 이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검찰 조사과정에서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뒷모습’이 추해졌다. 앞으로 그가 녹명을 강조하는 일도 없을 듯하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