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그 아름다운 思惟… ‘정원으로 가는 길’
입력 2012-04-26 18:37
정원으로 가는 길/질 클레망/홍시
“1998년 가을의 그날 저녁, 경복궁 정원의 장엄하고도 간결한 건축은 마치 모든 것이 안개로 이루어진 듯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기묘한 분위기는 단풍이 빛깔을 담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정원과, 이제 그 누구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삶의 기술’이라고 일컬을 만한 그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뒤얽힘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스스로를 정원사로 자처하는 프랑스 조경디자이너 질 클레망이 한국어판에 쓴 서문의 일부이다. 정원의 역사에 대해 들려주는 책 치고는 도판이 전혀 없는 게 기묘할 정도다. 물론 한국어판에는 저자의 동의를 얻어 저자가 직접 설계한 정원의 사진을 추가하긴 했다. 그러나 그가 정원 이야기하면서 일부러 도판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철학적이다. 그는 ‘이야기하는 정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도판이 빠진 원서는 길지 않다.
하지만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눈앞에 그가 말하고 있는 정원이 펼쳐지기도 한다. 굳이 이 책이 손에 잡히는 이유를 들자면 국토해양부와 시민사회단체가 서울 용산 미군기지 이전부지에 대한 개발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회 현상과 맞물려 어떤 시사점을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구태여 시사점을 찾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정원사 클레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도심 속 정원(공원)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책장을 열면 세계의 정원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들려온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향한 것은 1974년 7월이다. 아프리카의 희귀 나방을 찾기 위한 여행에서 그는 피그미족의 도움을 받던 중 우연히 ‘최초의 정원’을 발견한다. 피그미족 정착민의 정원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초기적인 형태의 정원이었다. 동시에 가장 인상적인 정원이기도 했다.”(19쪽) 땅콩 세 그루와 카사바 다섯 그루, 바나나나무, 토란 따위를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초라한 정원은 유목을 그만두기로 한 인류 최초의 정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채소밭에 대한 그의 상념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왕의 채소밭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왕의 채소밭은 산출이 아니라 권위를 제고하는 공간이었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정원이 베르사유 궁전의 채소밭 정원인 것이다. ‘왕의 채소밭’에 설치된 분수가 그 증거이다. “정원이 기능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물의 수직 분사는, 왕의 식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인 이곳의 생산물 전체가 베르사유성의 위엄 및 호사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34쪽)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 발리이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동양 정원을 함께 불러낸다. 형식적 외관 속에 포함되지 않는 ‘정신의 정원’을 추구하는 발리와 중국 일본 등지의 정원을 소개하며 이곳에 깊이 매료됐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아시아의 정신적 정원을 규모와 면적에 치중하는 서양식 사고에 대비해 ‘수직적 정원’으로 규정한다. “정원이 정신에 호소하는 게 사실이라고 치자. 그러면 암벽과 하늘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아시아의 정원은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 바로 이것이 수직 정원이다. 서양에서는 최고의 낙원이 땅 위에 펼쳐져 지평선까지 퍼져나간다.”(57쪽)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문명은 정신적 여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서 끌어내기로 한 반면 이미지에 매혹된 또 다른 문명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복잡한 외형에 만족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58쪽)
그의 여행은 인도를 거쳐 호주의 험하고 척박한 지역인 록하트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곳에 정원은 없었다. 알다시피 호주는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을 땅에서 몰아내고 대량학살한 잔혹사의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망은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 정착민촌을 이룬 록하트 강의 원주민들이 정원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서야 그 의문을 풀어줄 시 한 편을 우편으로 받는다. 원주민 출신의 여교사 아드리엔이 보내온 것이다.
“옛날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라고 시작하는 이 시는 “그리고 천지창조의 꿈을 꾸어/ 피곤해진/ 생명의 정령은 땅 속으로 들어갔네/ 휴식을 취하기 위해”라며 그에게 ‘정원의 부재’가 곧 ‘정원의 뿌리’임을 일깨워준다. “거기서 쉬고 있는 정령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과연 어떻게 땅을 갈고 땅을 열고 땅에 상처를 입힌단 말인가? 호주 원주민에게 있어 서양이 이해하는 의미의 정원을 만든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147쪽)
그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정원사들뿐만 아니라 정원의 출자자들은 정원이 조립식 무대처럼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정원은 ‘섬광 사회’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정원을 생태학적으로 관리하기가 복잡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계절 감각이라는 새로운 여건이 도입된다.”(161쪽)
우리는 어떤 정원을 꿈꾸어야 할까. 서울은 도심의 허파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 용산 미군기지의 공원화는 주변 개발을 위한 페인트 모션에 불과할까. 한국 방문 당시 아궁이를 보고 이렇게 약속을 한 클레망에게 대답을 간구해 본다. “나는 유럽에서는 낯설기만 할 어떤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대신, 마루 아래 설치된 저 놀라운 난방 장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고서도 편안함을 창시하는 우아한 방식이었다. 거기서 내게, 동물들이 그 어떤 행복감으로 그렇게 하듯 바닥에 웅크리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하리라.”(‘저자 서문’) 이재형 옮김.
질 클레망은
1943년 프랑스 앵드르 출생. 원예가, 식물학자, 곤충학자, 소설가. 베르사유 국립조경학교를 나와 오랫동안 강단에 섰다.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유년시절 정원에서 아버지를 돕다가 농약에 중독돼 이틀간 혼수상태에 빠진 경험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정원의 대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985년 공모전을 통해 설계에 참여한 앙드레 시트로앵 공원은 예술적이며 생태적인 정원 디자인으로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칠레 뉴칼레도니아 발리 등 세계 각지에 공공정원을 조성하며 독창적인 생태주의 정원 철학인 ‘움직이는 정원’ ‘제3의 풍경’ ‘지구 정원’을 실현해 보이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