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龍山 공원

입력 2012-04-25 18:26

서울 용산은 안산과 남산에서 한강으로 달리는 산세가 용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503년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서리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적혀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백제 기루왕 21년(서기 97년) 4월 한강에 두 용이 났다고 해서 용산이라 했다”고 돼있다.

남대문 바로 남쪽에 위치해 한강을 끼고 있는 용산은 수운을 통해 전국의 물자가 모이던 물류 중심지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 태종은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자감(軍資監) 분감을 설치했고, 선조는 훈련도감 급료 등을 관리하는 별영창(別營倉)을 두는 등 용산을 중시했다.

이런 지정학적 성격은 용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됐다. 고려를 침입한 몽골군은 이곳을 병참기지로 삼았다. 임란 때는 용산에 진을 친 왜군이 중국 명군과 휴전협상을 벌였는데, 조선을 쏙 빼놓고 ‘왜명강화지처’라 새긴 비석이 지금도 남아있다. 용산의 중심인 이태원을 두고 왜병들이 운종사에 머물면서 여승들을 겁탈해 다른 종족을 잉태했다는 의미에서 ‘이태원(異胎院)’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에 불과하나 아픈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말 난세 속에서 용산 침탈은 더욱 거세졌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견돼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은 병영으로 찾아온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군대를 배치했던 일본은 이듬해 이곳을 명성황후 살해의 지원지로 활용했다. 러일전쟁을 거쳐 일제는 1908년 사령부를 건설하고 인접 지역을 일본인 택지로 개발했다. 미군은 해방과 함께 일본군 기지를 장악하면서 용산에 입성했다. 신탁통치가 끝난 뒤 잠시 철군했던 미군이 6·25전쟁으로 되돌아온 다음부터 용산은 주한미군의 중심지가 됐다. 그로부터 30년 이상이 흐른 1988년 한·미 양국 정부는 도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미군 시설 이전에 합의했다.

국토해양부가 지난 23일 반환지역에 조성될 용산공원 설계공모 당선작을 발표했다.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이다. 당초 공원의 성격을 놓고 반외세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으나 ‘치유’ 정도로 기조가 정리된 셈이다. 치욕의 역사를 임의로 지우는 건 온당치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중심으로 용산을 확실히 자리매김 하는 게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는 지름길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