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진영] 김형태를 잊자는 말인가

입력 2012-04-25 18:31


“김 당선자는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제수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태(경북 포항남·울릉) 국회의원 당선자가 녹취록에서 언급한 ‘마지막 남녀 관계까지는 안 갔다’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 우리말의 맥락을 이해하는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마지막 이전 단계의 남녀 관계까지는 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즉 어느 정도의 ‘육체적 접촉’은 있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큰아빠가 술을 먹고 결정적으로 실수를 했어’라는 문장이 추가되면 당사자들 사이에 육체적으로 민망한 일이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입에 담기도 불쾌한 김 당선자의 녹취록을 일부 인용한 것은 그의 해명이 너무 어처구니없고, 이런 행태가 계속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암으로 사망한 동생의 아내를 성추행했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져 새누리당이 출당 움직임을 보이자 지난 18일 급히 탈당했다.

그러면서 녹취록에 대해 당시 이렇게 해명했다. ‘제수씨가…녹음 준비를 하고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아들 2명을 대동하고…아파트로 찾아와 아내마저 지켜보는 상황에서 따져 물어 전후 사정을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기에 했던 말’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잘못한 일이 없는데) 경황이 없어 얼떨결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문은 녹취록에 있는 그의 또 다른 말에서 풀린다. ‘죽을 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뺨따귀를 때려도’ ‘내 일생의 치욕’ 등의 격정적인 어휘를 쓰며 제수와 조카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무리 ‘제수의 협박을 받아 전후 사정을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엄청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집안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녹취록 공개 초기 김씨는 자기 목소리가 아니며 내용도 짜깁기된 것이라고 했으나 전문가 분석결과가 나오자 뒤늦게 자신이 맞다고 시인했다. 대신 ‘당시의 상황’ 운운하며 녹취록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쟁점을 흐렸다. 김 당선자는 수십년 방송기자를 했다. 직업적 특성상 ‘논리적 말하기’와 ‘사실 확인’에 어느 누구보다 익숙한 전문가다. 그런 그가 당황해 제대로 말도 못할 정도였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당혹스런 사건’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해명이 오히려 스스로를 옥죄는 셈이다.

김 당선자는 제수를 무고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 역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 것이란 현실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8년 전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을 경찰이 지금 무슨 방법으로 확인한단 말인가. 현재로서는 녹취록에 나타난 ‘자백’보다 더 유의미한 정황증거는 없다.

지금 경북 포항에는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회의원 사퇴 및 제명 청원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국회차원에서 그를 징계하기가 쉽지 않다. 당선자일 뿐 현직 의원 신분이 아니어서 징계 논의 대상이 아니다. 19대 국회가 개원하더라도 의원직을 수행하다 생긴 일이 아닌 과거 일로 징계할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윤리특위에서 다룬다 해도 그동안 관례로 봤을 때 ‘의원직 제명’이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지금껏 의원이 제명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야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나마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라디오 연설에서 검증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함에 따라 향후 새누리당이 어떤 조처를 내릴지 주목된다.

제수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지는 여론도 있다. 수년 전의 일을, 그것도 시숙이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상대 후보 사무실에서 이 같은 폭로를 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김 당선자의 말대로 돈을 노리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마저 인륜을 짓밟은 악행보다는 가볍다.

해법은 김 당선자의 몫이다. 자신의 주장대로 ‘사랑하는 당과 존경하는 박근혜 위원장’에게 돌아오는 길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제수 성추행범이 국민의 대표가 되는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정진영 카피리더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