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임미정] 봄의 선물

입력 2012-04-25 18:31


봄이 오긴 했었는데, 흐리거나 으슬으슬해서 환한 날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봄날의 온도나 햇살을 느낄 수 있는 날은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도 느긋하게 바라보아진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시며, 큰 포부도 좋지만 좀 더 다정한 태도로, 옆 사람 챙겨주며 부드럽게 사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그런 말씀들이 가슴에 들어오는 계절이다.

하지만 중년을 살다보니 그게 쉽지 않았다. 대단한 욕심을 부려서가 아니다. 좋은 음악을 만들고, 학교 발전에 도움이 되고, 학생들에게는 더 좋은 선생이 되고, 가족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공익을 위한 일에 신경을 쓰는 등 조금씩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일에 파묻히게 된다. 그래서 따뜻한 햇살 한 줄기나 봄의 신선한 생기를, 내가 원하면 항상 느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내 마음만 허락했다면 가질 수 있는 무한정의 아름다움을 즐기지도 못하다니 뭐가 그리도 바쁘고 급했던 것일까.

몇 년 전 어떤 신문에서 새로운 부유층인 보보스족의 성향이라며, 그들의 새로운 휴가방식을 소개한 적이 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아무것도 없는 아프리카의 자연에 들어가 석양을 보면서 소박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단한 식사도 아니고 화려한 인테리어가 있는 식당도 아니다. 다만 전화를 받을 필요도 없고, 인공의 자연이 아닌 그대로의 자연과 깊이 교감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휴가라고 소개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 한 분이 잘못 이해해 당신도 그런 곳에 가 보고 싶다고 부러워하셨다. 그런데 이것의 맥락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간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자연의 어떤 곳을 가는 것이고, 자신의 내면을 만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휴가는 내 집의 조그만 뒷마당에서 그윽하게 앉아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마음만 허락한다면 말이다.

얼마 전, 아는 후배가 그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무척 흥분해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들은 한 송이 들꽃에도 감사하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하라고 조언했었다. 어려운 결정일수록 내 마음이 아름다울 때 허락해야 좋은 결정일 것이다.

당분간 세상 나뭇잎의 색깔도, 삐죽 나온 새순도, 드러낸 팔과 다리에 스치는 온화한 바람도 다 예쁠 것이다. 이제 곧 여름이 오면 따뜻함이 심해져 버겁겠지만 지금은 자연의 축복을 맘껏 즐길 계절이다. 굳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지 않더라도 좋다. 자연의 수줍은 색깔과 귓가에 스치는 바람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마음이 덩달아 바람이 났지만 그래도 좋다. 내 마음이 내게 천국을 선물하고 있는 중이니까.



임미정(한세대 교수·하나를위한음악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