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정자 하나, 길손은 시인이 된다… 안동 풍산들길
입력 2012-04-25 18:39
연분홍 산벚꽃과 연두색 신록이 나날이 채도를 더하는 4월의 산하는 산골 처녀의 얼굴처럼 화사하고 수수하다. 봄비라도 내려 이 산 저 골에서 산안개가 피어오르면 산하는 한 폭의 수채화를 연출한다. 낙동강과 건지산을 벗한 경북 안동의 ‘풍산들길’이 바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속을 유유자적하는 길이다. 안동시내 서남쪽에 위치한 남후면의 벼랑길과 강변길, 그리고 오솔길과 마을길을 걸어 풍산읍 소산리의 안동한지전시장에 이르는 14.5㎞는 안동유교문화길 제1코스인 풍산들길. 고택과 자연이 어우러져 산수화를 그리는 풍산들길의 출발점은 남후면 단호리의 낙암정. 안동시내를 통과한 낙동강이 건지산 줄기에 가로막혀 ‘U’자 형으로 돌아나가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낙암정은 조선 전기 문신인 배환이 노년에 유유자적하던 소박한 정자.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색창연한 낙암정에서 솔향기 그윽한 숲으로 들어간 풍산들길은 낙동강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전망대를 거쳐 낙동강생태학습관에서 잠시 호흡을 고른다.
낙동강생태학습관 앞에 위치한 상락대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고려 명장 김방경이 젊은 시절에 무예를 연마하던 곳. 낙암정에서 상락대까지는 깎아지른 절벽. 신록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유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낙암정은 상락대에서 보면 한 마리 학이 둥지에서 날개를 접은 형상이다.
풍산들길에서 만나는 두 번째 정자인 낙강정은 낙동강 옆의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소담스런 건물로 조선 중기 문신인 권예가 지은 정자이다. 예천에서 옮겨온 낙강정은 주변 풍경이 낙암정에 비해 못하지만 정자 뒤로 펼쳐지는 아름드리 노송 숲의 운치는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낙강정을 출발한 풍산들길은 단호리의 상단지, 중단지, 하단지로 이어지는 농촌마을의 정겨운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건지산에서 세 갈래로 뻗어 내려오는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은 온갖 봄꽃들이 피고 지는 꽃동네. ‘단지’는 마을이 둥실한 단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고. ‘단호’는 바위와 언덕이 모두 붉은색인데다 마을 앞에 큰 소(沼)가 있어 붙여진 지명.
하단지에서 낙동강자전거길을 만난 풍산들길은 벚나무 가로수가 도열한 둑길을 일직선으로 걷는다. 빗물에 불어난 강물은 선비의 글 읽는 소리처럼 청아하고, 대지를 적시는 봄비 소리는 여인의 속삭임처럼 은근하다.
풍산들길은 오미마을에서 야트막한 봉우리인 오미봉을 만난다. 오미봉에 가로막힌 풍산들길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는 오미마을로 올라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단호교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단호교에서 마애선사유적전시관을 거쳐 마애솔숲에 이르는 구간에는 낙동강 최고의 절경이 숨어있다. 말발굽처럼 생긴 건지산 산자락이 낙동강을 향해 내달리다 깎아지른 단애를 형성한 망천절벽이 그 주인공으로 병산서원이나 하회마을의 절벽보다 규모가 크다.
망천절벽은 마애마을의 형상이 중국의 망천을 닮았다고 해서 따온 이름이고, ‘마애’는 강변에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상이 있어 붙여진 지명. 마애마을의 상징인 망천절벽은 낙동강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찬사를 받아왔다.
조선시대 안동읍지인 ‘영가지’는 망천절벽의 풍경을 가리켜 “절벽이 옥을 깎아지른 듯 여러 봉우리가 삼면에 경치를 이루고 넓은 들, 맑은 모래, 그 경치와 기상은 언어로 다 형용하지 못하겠다”고 찬탄하고 있다. 망천절벽을 배경으로 한 넓은 백사장과 푸른 강물, 그리고 울창한 마애솔숲은 사계절 절경을 연출하지만 낙동강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가장 아름답다.
마애마을은 안동 최초로 발견된 선사유적지로 강변에 마애솔숲 문화공원을 조성하던 중 깬석기 등 구석기시대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 이 유물들은 강변에 건축된 마애유물전시관에 전시돼 마애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증거한다.
수령 100년이 넘는 소나무 3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마애솔숲에서 도로를 건너면 산수정이 위치한 마애마을. 산수정은 조선 선비인 이돈이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10년쯤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토담에 둘러싸인 산수정에 오르면 마애솔숲과 강 건너 망천절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절로 시심을 북돋운다.
마애마을에서 나지막한 야산을 넘으면 예안이씨종택이 위치한 풍산읍 하리리의 우렁골마을. 전의 이씨와 예안 이씨가 400여 년 함께 살면서 수많은 선비를 배출한 마을로 하루를 반성한다는 뜻의 일성당을 비롯해 침류정, 체화정 등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야산에서 마을로 내려서기 직전에 숲에서 조우하는 외로운 정자는 조선 세조 때의 청백리 이화가 후진을 양성하던 침류정. 인근에는 이화의 사당인 지산사우와 이화의 7세손인 이산두의 영정을 봉안한 어필영정각 등이 유서 깊은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우렁골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는 보물로 지정된 예안이씨종택이 고풍스런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온 풍산들길은 924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한 체화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만난다. 자그마한 동산을 배경으로 연못을 품고 있는 체화정은 조선 효종 때 이민적이 지어 형 이민정과 함께 우애를 나누던 곳. ‘체화’라는 당호는 우정을 상징하는 단어로 시경에서 따왔다.
정자 앞 연못에는 방장산(지리산),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으로 널찍한 정원을 꾸몄지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해 주인의 품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담락재(湛樂齊)’라는 현판은 체화정의 간결한 아름다움에 반해 자주 찾았다는 단원 김홍도의 글씨.
풍산들길은 풍산장터와 풍산읍내의 소박한 풍경을 뒤로하고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가는 길목에 위치한 안동한지전시장에서 수채화 밖으로 나온다.
안동=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