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양가감정

입력 2012-04-24 16:08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 차기 총재로 확정됐습니다. 김 총장은 어릴 적 미국으로 이민간 미국 시민권자지만 우리 국민은 마치 대한민국의 경사인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도 세계은행을 이끌 그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한 소수 의견은 있었지만, 동양계라고 비아냥대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동양인으로선 최초로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이 되었을 때도 그러했지요.

케이크 먹자니 뱃살이 걱정

이와는 대조적으로 결혼 이주로 우리 국민이 된 이자스민씨가 비례대표로 이번 총선에서 당선되자 온라인상에서 그를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비난들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격이나 능력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귀화 이주민에 대한 혐오에서 나온 것이기에 다문화를 포용하고 세계시민의 일원이 돼야 할 우리에겐 우려를 일으킵니다. 이를 1면에 다룬 한 일간지에선 제목으로 굵게 ‘이중성’이라고 썼습니다.

건강 생활에도 이중성의 갈등은 은밀히 잠복해 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도 괜히 냉장고 앞을 어슬렁거립니다. 레몬 케이크를 꺼내먹자니 두툼한 뱃살이 생각나고 포기하자니 그 달콤함과 입안에서 폭신거리는 감촉을 놓치기 어렵습니다. 젊은 시절처럼 옷태나는 몸매를 유지하고 싶어 체육관으로 나서지만 하필이면 그 때 깜박 잊고 있던 식사 모임 약속이 생각나 갈등합니다. 건강을 생각해 모처럼의 휴일에 큰 맘 먹고 뒷산을 오르자니 다리가 아프겠고, TV 앞에 앉아 있자니 맑은 공기와 초록빛 나뭇잎과 청아한 새소리가 그립습니다. 나이 들면서 배변 습관의 변화가 생겨 ‘혹시?’하는 걱정에 직장내시경검사를 예약하고도 막상 밤새 마셔야 할 설사약을 받아들면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한 대상에 대한 상반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를 심리학에선 ‘양가감정’이라 부릅니다. 감정이란 게 상황에 따라 바람처럼 변하긴 하지만,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양가감정이 아이들에겐 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네 장래를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겠지? 그렇지만 엄마는 외로울 거야.” 홀어머니가 직장을 찾아 서울로 떠나려는 아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보내고도 싶지만 동시에 붙잡아 곁에 두고도 싶습니다. 아들은 떠나야할지 머물러야할지 망설여집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는데 멀리서 찾아온 친구가 있어 외출하겠다는 딸에게 아버지는 선뜻 허락할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용돈을 내밀며 “공부는 내일하면 되지. 놀러갔다 와.”하고 말하지만 얼굴엔 마뜩찮아 하는 표정이 역력해 딸이 보기엔 전혀 일치감이 없습니다. 보낼 수도 보내지 않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딸의 처지가 이중구속에 빠져 있는 꼴입니다. 마음과 말이, 말과 인격이 같지 않은 가정에서의 비일치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렇다고 양가감정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중 메시지를 던짐으로 자신의 견해를 한 번에 전달할 수 있고 상대에게 사물과 상황을 고려하는 폭을 넓히게 해줍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시며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교훈전달 방식은 사뭇 인상적입니다. 비유는 숨기는 기능과 밝히 드러내는 기능, 양쪽을 다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이중성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보이신 양가감정은 제 신앙생활의 버팀목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전자의 기도에선 광야에 머무르는 제 삶의 호소를 읽고, 후자의 기도에선 제가 추구해야 할 영광을 봅니다. 이중성이나 양면성, 혹은 양가감정이 우리 주님 안에서처럼 우리 사회 안에서, 나의 영혼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그날을 기대해봅니다.

<대구 동아신경외과 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