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한국, 美·中의 균형추?
입력 2012-04-24 18:05
최근 워싱턴DC의 한반도 연구자들 모임에서 곧 고려대 국제대학원에 유학할 예정이라는 미국 청년을 만났다.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대 석사과정 1년을 마쳤다는 그는 당초 계획과 달리 한국을 전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학부 때 일본에도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다는 그가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한국 연구자가 되기로 한 이유가 재미있었다. 베이징대에서 공부하면서 앞으로 한국이 세계 양대 강국인 미국과 중국의 ‘중재자(mediator)’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중재자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며 워싱턴 고위 외교소식통의 얘기가 떠올랐다. 최근 미국 정가와 외교가의 최대 관심은 ‘중국의 부상을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르면 2010년대 후반으로 예상되는 중국 경제력의 미국 추월을 앞두고 미국 정부는 견제와 봉쇄보다는 협력과 공존을 기본으로 하되 부족한 국력을 다른 데서 보충, 균형을 맞추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미·중 관계의 균형추 역할을 할 존재로 한국을 새롭게 보더라는 게 그 소식통의 결론이었다. 이는 북한에 대응하기 위한 변수나 한반도에 국한된 나라 정도로 보던 종래의 인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워싱턴의 인식 변화는 언뜻 크게 환영해야 할 일로 보인다. 그 외교 소식통이 전한 대로 여기에는 연간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넘어선 역동적인 경제와, 가끔 혼선이 있긴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5년마다 국정의 혁신을 이뤄내는 우리 정치시스템에 대한 높은 평가가 배경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평가와 별도로 미국의 세계전략의 필요에 따라 한국의 역할을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는 없는지 따져 봐야 할 것 같다. 우선 한국의 ‘재발견’은 동북아와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믿을 만하고 튼튼한 동맹으로 여겼던 일본의 상대적 쇠락에 대한 대응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부는 거의 매년 총리가 바뀌는 일본 정치시스템의 불안정과 비효율, 20년을 넘어가는 장기불황에 따른 경제력 쇠퇴 등의 문제를 일본이 자력으로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큰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기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요구 등을 통해 미·일 군사동맹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새로운 대안으로 한국의 가치를 높였을 수 있다.
둘째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속되고 있는 우리 측의 미국 최우선 외교노선에 대한 미국의 화답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한국 인사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등 미국 측의 얘기를 빌리더라도 최근 한·미 관계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미 관계 전성기에 중국의 불만은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중국 전문가에 따르면 일부 중국 군 장성들은 사석에서 “한국에게 따끔하게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고까지 말하며 불만을 토로한다고 한다. 이미 중국이 한국의 최대 무역국이 된 지 오래고 대중 경제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질 게 분명한 상황에서 중국의 이러한 불만은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한·미 동맹을 기본으로 하되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인근 강국이 ‘섭섭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김대중 정부 당시의 외교 지침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중 관계의 균형추 역할이라는 미국의 기대에 혹할 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반도의 안정과 장기적 국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균형감각’이 필요한 시기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