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내 인생의 가장 환한 밤
입력 2012-04-23 18:11
“아버지를 따라 나선 달빛 내린 밤… 때죽나무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렸다”
열두 살 적 봄이었다. 그때 나는 외할머니가 살고 계신 시골에 있었다. 늦은 밤, 서울에서 아버지가 오셨다. 친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새말에 있는 작은집으로 가야 한다고 아버지는 말하셨다. 담담한 척하셨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몹시 슬퍼보였다.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버스도 끊어진 밤늦은 시간이었다. 그 먼 곳을 어떻게 걸어갈까 걱정이 앞섰다. 산길을 따라 지름길로 간다 해도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솟구치는 마음을 발끝에 팽팽히 모았다.
아버지는 기린 같은 그림자를 끌고 산길을 앞서 걸으셨다. 달빛 내린 소나무숲길은 암전 뒤에 느껴지는 착시처럼 가물거렸다.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로 내 발걸음 소리가 가려졌다. 개미들은 줄을 지어 환한 찔레꽃 봉오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산 고개를 하나 넘었다. 기다란 나무다리를 지나 달빛 내린 시냇물도 건넜다. 밤하늘의 은하수 마을은 촘촘히 박힌 별들 때문에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달이 참 밝구나.”
아버지께서 나직이 말씀하셨다. 이후 고개를 하나 더 넘을 때까지 아버지는 앞만 보고 걸으시면서 “먼 길 갈 때는 달빛을 보며 걸어라”라고 내게 말하셨다. 어렸던 탓에 나는 아버지가 하신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달빛이 앞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 뒤를 비추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도 들렸고, 산길 위로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밤, 아버지와 나는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달빛 쏟아지는 하늘로 올라갔다. 때죽나무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던, 내 인생의 가장 환한 밤이었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났다. 소쩍새 우는 밤, 늙으신 아버지와 함께 뒷산을 걸었다. 달빛을 감고 흐르는 계곡물 옆으로 여뀌꽃, 달개비꽃, 오이풀들이 꾸벅꾸벅 고개방아를 찧고 있었다. 문득, 열두 살 적 달빛 환한 밤이 생각났다. 밤하늘의 달빛은 그날처럼 환한데, 늙으신 아버지는 그때만큼 걸음을 걷지 못하셨다. 검은 머리도, 실팍한 어깨도, 씩씩한 걸음걸이도, 아버지는 걸어오신 길 위에 모두 잃어버리셨다. 별빛 하나도 내려앉을 수 없는 아버지의 뺨이었다. 파랑(波浪) 같은 시간을 건너는 동안 아버지의 꿈은 부서졌고 부서진 꿈을 줍고 있던 아버지는 맨발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며, 아내와 철없는 자식들 눈치를 보며, 아버지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불빛을 더듬어 먹이를 물어다 키운 자식들은 자신의 삶으로만 분주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풍경 속으로 아버지는 걸어가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아버지, 달빛이 참 환하네요.”
“그렇구나. 달이 참 밝다.”
아버지는 달을 올려다보시며 느릿느릿 말씀하셨다.
“아버지, 기억나세요? 제가 열두 살 적에 아버지하고 같이 외갓집에서 작은집까지 걸어갔었잖아요. 그때 산길로만 몇 시간 동안 걸었던 것 같은데요.”
“기억나지…. 어린 아들하고 걸었던 먼 길이었는데 잊힐 리 있나.”
“아버지가 그때 하셨던 말씀 기억나세요?”
“글쎄다…. 기억이 안 난다.”
“그때 아버지께서, 먼 길을 갈 때는 달빛을 보며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랬었나?”
“네…. 그 후로 달을 볼 때마다 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어요.”
아버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시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잣나무 오솔길을 내려왔다. 어둠 저편에서 파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나비는 어둠을 가로지르며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영원을 향해 가는 돛단배처럼 나비는 수평과 수직을 그으며 달빛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