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지하궁 언제 열까… ‘제국의 빛과 그늘’
입력 2012-04-19 17:59
제국의 빛과 그늘/장점민(張占民)/역사의아침
중국 섬서성에 있는 진시황릉은 진시황의 봉토와 그 주변에 딸린 각종 배장갱 및 배장묘를 통틀어 지칭하는 ‘진시황 능원’을 가리킨다. 진시황릉 봉토를 중심으로 내성과 외성 구역이 좁은 의미의 능원에 해당한다. 이 구역의 규모만 동서 974m, 남북 2173m로 면적은 약 211만㎡(약 70만평)에 이른다. 1974년 섬서성 농부들이 우물을 파다 발견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1호 병마용갱은 진시황 능원을 벗어나 동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다. 8000개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마용이 발굴된 1호 병마용갱도 진시황 능원에 딸린 배장갱 중 하나일 뿐이니 넓은 의미의 진시황 능원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진시황 능원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본격적인 발굴이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섬서성 출신의 고고학자 장점민(張占民)은 이 문제를 끄집어낸다. “진시황릉은 어째서 파지 않는가? 말을 바꾸어 진시황릉은 언제 발굴하는가?”(‘저자 서문’)
사실 황릉을 발굴하자는 지방 정부의 주장은 1950년대부터 수시로 터져 나왔다. 1959년 봄,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는 베이징에 사람을 보내 당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무덤인 건릉(乾陵)에 대한 발굴 계획을 보고했다. 당시 문화부 관리들은 참조할 만한 법규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사태의 중대성을 느끼고 ‘건릉 발굴 계획’을 주은래 총리에게 올렸다. 주은래는 친필로 “우리는 이 일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으므로 후손이 완성할 수 있게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주은래의 안목으로 건릉 지하궁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성에서 유행처럼 일어난 발굴 열풍을 제때에 잠재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흔히 중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조차 ‘왜 진시황릉을 파지 않는가’라고 질문한다.
시황은 진(秦) 소왕(昭王) 48년인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에 이어 황제가 된 그는 즉위 직후에 능묘 조성 사업을 시작했으나 이 사업은 결과적으로 그의 작은아들이 즉위한 이듬해 겨울까지 장장 38년간 이어졌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사실 이 엄청난 공사의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 공사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자가 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진시황릉 조성에 관한 가장 충실한 사료인 ‘사기’ 권6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9월, 시황을 여산에 안장했다. 시황이 막 즉위해 여산에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천하를 합병하자 전국 각지에서 노역을 위해 온 자만 70만이 넘었다. 우물 셋 깊이만큼 파고 덧널에까지 이르도록 동을 부었다. 그 안에는 궁관과 백관, 기이하고 괴상한 기물을 운반해 가득 채웠다. 장인에게는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을 만들게 하여 무덤을 파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하게 했다.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기계에 의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 천장에는 천문도를, 바닥에는 지도를 만들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었는데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계산했다.”(‘역자 서문’)
이에 근거해 관광 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하궁에 독가스 성분을 함유한 대량의 수은이 있기 때문에 지금껏 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안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수은은 휘발성이 강한 물질이다. 2200년 전의 수은은 이미 다 날아가고 흔적도 없을 것이다. 진시황릉 봉토 표면에 나타난 ‘수은 이상 현상’이 그 결과일 것이다. 적어도 지하궁의 독가스는 진시황릉을 발굴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은 독가스를 내세워 사람들을 잘못 안내해서는 안 될 것이다”(28쪽)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발굴 찬성론자는 아니다. 오히려 황릉 발굴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진시황릉을 당장 발굴할 수 없는 이유로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한다. 우선은 죽간이다. 진시황은 지식인과 일반인이 책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가능한 한 독서를 금지시켰지만 그 자신은 결코 책을 싫어하지 않았다. 책에 대한 진시황의 애호는 역대 어떤 제왕과 비교해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진시황은 매일 읽어야 할 문서의 무게를 달아서 매일 양을 정해놓고 그 양을 채우지 못하면 쉬지도 못했다.”(‘진시황본기’)
진(秦)의 무게 단위로 1석은 무려 120근이다. 진시황은 ‘석’ 단위로 문서의 무게를 쟀으니 그가 하루에 읽었던 문서의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려준다. 책에 대한 진시황의 사랑은 당시 지명도 있는 유생으로 구성된 고문단(지금의 박사급) 70명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진시황릉 지하궁에 죽간이 묻혀 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2000년이 넘은 죽간을 발굴한다고 해도, 공기와 접촉해 부식 과정이 더욱 빨라지는 죽간을 온전히 보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논리이다.
또 지하궁에서 벽화나 비단 따위에 그린 그림이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나라에서는 벽화의 색깔을 내는 원료로 한·당의 벽화와 달리 대부분 광물질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색을 보존하는 자체에도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일단 무덤을 파서 대량의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면 벽화나 비단에 그린 그림은 더욱 보존하기 어려워진다.
나아가 진시황의 시체를 담은 목관의 칠기와 색 보존도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문제다. 예컨대 병마용갱에서 발견한 활과 수레, 무기의 나무 손잡이는 전부 썩어 있었다. 따라서 진시황릉에서 생각지도 못한 유물이 나온다면 그 처리 방법은 거의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명료하다. 지하궁 유물에 대한 보호의 어려움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진시황릉 유물 보호나 실험과 관련한 연구 과제도 앞으로 10년 안에는 돌파구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제왕의 무덤을 파는 것은 대단히 엄격하고 신중해야 할 계통적 공정이다. 따라서 그 공정 중 작은 고리 하나라도 주의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면 메울 길이 없는 손실을 초래하게 된다. 진시황릉이든 건릉이든 섬서성은 물론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산이다. 이런 황릉을 파는 일은 결코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역자는 10년 넘게 저자와 교류해온 사학자 김영수씨.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