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진보세력이 살아남으려면

입력 2012-04-19 18:11


진보는 혁명 없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베트남 독립을 위해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평생을 싸운 호치민의 어록에 나온다. 가진 사람의 재산을 몰수해 무산계급에게 나눠주려면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는 정부를 뒤엎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이 명제의 유효성을 다시 확인했다. 다만 혁명이란 호치민 시대와 같은 정부 전복이 아니라 진보세력 자체의 뼈를 깎는 각성과 반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했다. 지금처럼 대학가 등에서 치열한 의식화 과정을 거친 엘리트 출신 당 간부들과 스타 의원 몇몇으로는 이 땅에 진보를 뿌리내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다.

진보세력은 민주통합당과 합친 의석수에서는 여당에 뒤졌지만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석수가 이전보다 늘어나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다. 논자에 따라서는 민주당을 개혁세력으로 묶어 진보개혁세력이 불모지인 부산에서도 40%가량의 안정된 지지율이 유지됐다며 낙담할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의석 증가에 취할 때 아니다

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울산과 창원에서는 국회의원은 물론 구청장까지 한때 차지했지만 이번에 이 지역에서 완패했다. 통진당이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지역에서 이득을 봐 전체적으로 지난 총선에 비해서는 약진했지만 진정한 약진인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 ‘절반의 승리’하고 주장하지만 새누리당 이상의 쇄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엇보다 진보세력의 미래가 결코 밝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서울과 지방의 두 대학에서는 운동권이 주도한 학생회장 선거와 집회에 참여율이 저조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래의 진보세력 자산인 20대들이 급속히 등을 돌린다는 반증이다. 취업난에 정신이 없어 그렇다고 위안하겠지만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럴수록 진보의 가치는 더욱 주목받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한국정치에서 진보의 가치는 소중하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좌클릭해 서민층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으며 국민들을 유혹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노동자·농민 등 서민대중의 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소수의 억울함과 분함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국익’이라는 구호로 몰가치적인 횡포를 부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필요 이상으로 북한을 의식하는데다 뿌리 깊은 진영논리에 함몰된 진보세력은 번번이 국민의 선택에서 제외된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도 아무런 말이 없고 왕조시대처럼 아들이 손자에게 권력을 물려줘도 침묵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보세력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소수 목소리에 관심 가져야

이제 진보세력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자영업자, 소상인, 환경, 핵문제, 다문화 가정 등 다른 정치세력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영역에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는 길이 있다. 비정규직 문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면 된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세력의 한 주체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호치민은 혁명과정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각각 여섯 가지를 제시하며 이를 염두에 두고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야 할’ 여섯 가지 가운데 한 항목은 이렇다. 주민들에게 우리가 진지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규율을 잘 지킨다는 인상을 남길 것. 집권하기를 꿈꾸는 정치집단이라면 실천하기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