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7) 낙타 무릎의 야고보

입력 2012-04-19 18:06


부활 예수님 만난 야고보 크게 변화… 기도와 행함의 ‘의인’으로

베드로의 구술을 따라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먼저 그 서두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그러므로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조상이나 그 탄생의 내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분을 낳은 마리아와 그 가족만을 간단히 소개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 6:3)

그러나 마태는 거기에 예수를 양육한 요셉을 추가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

후일 마태와 누가의 서로 다른 계보를 합리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고심하던 로마 교회는 분명치 않은 마리아의 계보에 매달리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아들’ 개념에 집중하여 마리아를 신성한 여인으로 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 ‘동정녀’라는 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수를 잉태하기 전의 마리아는 동정녀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그러나 로마 교회의 ‘동정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를 출산한 후의 마리아가 그 후에도 여전히 동정녀로 살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가와 마태가 기록해 놓은 ‘예수의 형제들’ 즉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었다. 그 중 하나가 오리겐 등이 주장한 것으로 ‘예수의 형제들’이란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하기 이전에 전처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외경 야고보서’에서는 제사장이 요셉에게 주님의 처녀를 받아들여 보호하라고 하자 그가 대답한다.

“나에게는 아들들도 있고, 너무 늙었습니다.”(‘외경 야고보서’ 9:2)

당시에 마리아는 16세였다고 적혀 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는 16세였다.(‘외경 야고보서’ 12:3)

그녀를 영원한 동정녀로 만들기 위한 이런 해석은 마리아와 요셉의 아름다운 그림을 16세 처녀와 늙은 남자의 민망한 장면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이후에 아기를 낳지 않았다는 것으로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는 ‘형제’라는 말을 ‘사촌’ 또는 ‘친척’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형제’들의 이름을 예수의 제자들 중 같은 이름의 제자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즉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즉 작은 야고보’와, 시몬은 ‘셀롯인 시몬’과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와 동일시하고, 요셉은 제자 중에 없으므로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막 15:47)’의 요세와 같은 인물로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 19:25)’와 동일시 되는데 결국 예수의 형제 요셉이 글로바의 아들이 되는 기묘한 결론까지도 나오게 된 것이다.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로 만들기 위한 로마 교회의 고심은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마침내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즉 ‘하나님의 어머니’로 하자는 논의로까지 진전된다. 그리고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이 ‘테오토코스’ 안건을 정식으로 가결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이 예수 뿐이었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열두 살된 예수를 잃어버린 사실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아래로 네 명이나 더 있는 아들들을 챙기기에 바빠서 열두 살 된 예수는 잘 따라오려니 하고 방심한 것이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눅 2:44)

마리아는 다른 갈릴리 사람들처럼 저항 정신에 투철한 보통 여인이었고(눅 2:51) 예수의 아우들 역시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유대의 명예 회복을 바라는 ‘나사렛 사람’의 후예들이었다. 예수의 친척들은 그가 큰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이나 내쫓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그를 잡으러 왔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막 3:32)

그러나 예수께서는 차가운 어조로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

그 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전 마지막 초막절에는 예수의 아우들이 그분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2∼5)

초막절은 유대인들에게 추수의 절기, 곧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동생들이 권한 것은 ‘유대의 회복’을 위한 거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내세워 거사하려던 갈릴리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눅 13:1)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우들과 함께 가지 않고 후일 따로 은밀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모친과 아우들이 그분과 함께 다녔다는 기록이 없다. 그 후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은 골고다의 처형장이었고(요 19:25), 예수의 아우들은 그분이 승천한 후 제자들과 여자들이 마가의 집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들은 그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비로소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오신 분이었던가를 깨달아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고보는 부활한 예수를 따로 만나고나서 크게 변화되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고전 15:7)

AD 44년 아그립바 Ⅰ세의 박해로 투옥되었던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출옥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며 야고보에게 교회를 부탁했다.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 12:17)

그 때부터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와 사도들이 함께 교회를 다스리게 되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3)

사람들이 그를 ‘의인’이라고 칭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모든 인간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야고보의 무릎은 낙타의 무릎처럼 딱딱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인 또는 오블리아스라고 불렀는데 오블리아스는 인간의 방파제이며 의로움이라는 뜻이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3)

그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로 있을 때 큰 흉년이 있었고, AD 46년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를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다. 그리고 돌아갈 때 바나바의 생질 마가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후 안디옥에서 일어난 할례 논쟁 때문에 AD 49년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야고보의 현명한 중재로 총회는 무사히 끝나게 된다. 야고보는 어려운 시기에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며 믿음과 행함을 함께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썼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AD 62년, 유대인들이 그를 성전 위로 끌고 올라갔다.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데리고 갔던 그 성전 꼭대기에 이번에는 그 아우 야고보가 선 것이다.

“그들은 야고보를 난간에서 내던지고 돌로 쳐서 죽였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3)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