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신의와 사랑이 계책보다 위대하다

입력 2012-04-16 18:13


영화 ‘초한지’는 천하의 두 영웅,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그려주었다. 사실 그 싸움은 책사들의 지략 대결 이었다. 항우의 책사인 범증은 유방을 ‘홍문의 연회’에 초대하여 살해하려는 계책을 꾸민다. 그러나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뛰어난 지략으로 유방을 구한다. 그 후 장량은 항우의 부하가 된 것처럼 간계를 꾸민다. 결국 항우는 유방과 장량의 계책에 휘말려 범증을 초야로 내쫓아버리고 홀로 최후의 해하대전을 맞는다. 그런데 항우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우희가 있었다. 그녀는 검술과 비파에 능한 절세미인이다. 유방도 그런 우희를 연모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항우에 대한 사랑을 지키며 함께 최후를 맞는다.

마침내 유방은 천하통일의 꿈을 이룬다. 그런데 유방은 범증이 떠나기 전, 항우에게 쓴 편지를 발견한다. 사실 그것은 훗날 장량과 한신이 함께 반역을 꾀할 것이라는 범증의 마지막 계책이었지만. 그래서 유방은 범증의 묘략에 속아 부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토사구팽으로 한신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장량도 내쫓아버린다. 유방은 그 후로 언제 독살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다가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 이후에, 후예들이 다시 홍문연을 찾는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경의를 표한 사람은 항우나 유방도 아닌, 마지막까지 신의와 사랑을 지킨 여인, 우희였다.

그렇다. 계책보다 위대한 것이 신의와 사랑이다. 우희가 살아 있었을 때, 홍문연으로 떠나는 유방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천하를 얻은 후, 그 대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방이 대답한다. “그것은 사람을 믿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초한지는 사람을 속이는 계책과 묘수, 지략보다 더 위대한 것이 신의와 사랑임을 보여준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마치 천하패권을 놓고 초한대결을 펼치는 것처럼 온갖 지략과 계책을 써서 기득권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최후의 승자는 없고 결국 신의만을 상실하는 결과를 빚었지 않는가. 마치 항우가 천하의 책략가 범증을, 유방이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장량과 한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지략과 계책, 권모술수가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계책일지라도 신의와 사랑이 없다면 결국 불신과 배신을 낳는다. 그리고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부메랑이 되고 독이 된다. 지금도 한국교회를 살리고자 하는 수많은 묘안과 책략을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신의와 사랑의 진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하고 헛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죽이는 양패구수(兩敗俱輸)가 될 뿐이다. 이제 다시 서로를 향한 신의와 사랑을 회복하자. 그럴 때 한국교회는 분열과 파괴가 아닌, 화해와 상생의 나래를 펼치며 비상할 수 있다. 겨울의 폐허를 지나 다시 봄꽃이 화사하게 핀다. 온갖 계책과 지략, 권모술수가 판치던 난세에도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켰던 여인, 우희의 가녀린 사랑처럼, 우리도 그런 꽃을 피워볼 순 없을까.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