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메이플라워호의 강력한 지도자 월리엄 브래드포드 (上)
입력 2012-04-16 18:13
전 재산 팔아 청교도들 신대륙으로 떠날 돈 마련한 청년…
“빨리 올라 타, 지역 민병대다!” 네덜란드인 선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험버강 둑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태운 다음 남자들을 태우던 중이었다. 겁에 질린 선장은 급히 배를 출항시켰다. 더 이상 지체하면 탈출은 수포로 돌아간다. 미처 타지 못한 남자들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배는 그대로 출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절망에 빠진 부녀자들이 항구에 남겨진 남편들을 보며 배 갑판에서 울부짖었다. 이렇게 떠나면 영영 이별인가, 어떻게 그리운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번 탈출은 한번 실패한 뒤 어렵사리 다시 시도한 탈출이었다. 처음 고용했던 선장이 그들을 배신하고 관청에 밀고해 버려 주모자 몇몇이 몇 개월 동안 철창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모자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믿을 만한 선장을 물색해 곧바로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남편들은 모두 몇 개월 뒤 탈출에 성공해 다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영국을 탈출해 네덜란드로 향했던 사람들은 작은 마을 스크루비의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이었다. 왜 이들은 조국인 영국을 몰래 탈출해 네덜란드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제임스 1세는 햄프턴 코트에 종교지도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청교도 작자들을 모두 이 나라에서 몰아내고 말테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사형당한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아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녀로 후사가 없이 죽자, 그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가톨릭교도인 메리 여왕의 아들이지만, 존 낙스와 조지 뷰캐넌 같은 장로교도에게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 청교도 지도자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1000여명의 목사들이 교회 개혁을 위해 제임스 1세에게 ‘천인의 청원(Milenary Petition)’을 제출했다. 그러나 1603년 대관식을 거행한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를 신봉했고 처음부터 반개혁적 입장을 분명하게 내보였다. 국교회를 신봉하지 않는 자들을 영국의 내적 통합을 저해하는 불평분자들로 간주했다. ‘천인의 청원’을 처리하기 위한 햄프턴 코트 회의에서도 제임스 1세는 “주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고 외치면서 장로주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화해를 위해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햄프턴 코트 회의 이후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받았다. 특히 국교회의 관습과 의식을 인정하지 않았던 많은 청교도들이 기소되고 처벌을 받았다. 제임스 국왕의 반개혁정책으로 청교도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교회 개혁을 탄압하는 영국 교회에 남아 개혁운동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영국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전자를 선택했다. 영국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릇된 교회를 떠나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소위 분리주의자들은 영국 교회를 떠나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스미스를 중심으로 하는 분리주의자들은 게인스보로에 영국 국교회와 무관한 첫 번째 분리주의 교회를 세웠다. 곧이어 1606년에 스크루비에서 월리엄 브류스터와 존 로빈슨을 중심으로 하는 두 번째 분리주의 교회를 세웠다. 영국 교회 당국은 분리주의자들을 좌시하지 않고 체포령을 내렸다. 분리주의자들은 영국을 탈출해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1608년에 존 스미스가 이끌던 게인스보로 교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떠났고, 1609년에 스크루비 교인들도 네덜란드의 라이덴으로 떠났다.
험버강 둑에서 우여곡절 끝에 네덜란드로 탈출했던 청교도들이 바로 스크루비의 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네덜란드의 라이덴에 도착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존 스미스가 이끌던 교인들은 비교적 네덜란드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존 스미스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교인의 자격을 강화했다. 교회의 입교 기준을 세례로 정했다. 회개한 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재세례를 실시해 암스테르담에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라이덴에 정착한 스크루비 교인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라이덴은 인구 4만 명에 달하는 무역도시라 농부였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치른 직후라 경제 상황도 아주 나빴다. 결국 남녀노소 모두 직물 작업에 고용되어 밤낮으로 죽어라 일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자녀들은 방치되었다. 자녀들은 안식일을 쉽게 범하고, 영어를 잊고 네덜란드 사람처럼 행세하였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영국의 문화유산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어렵게 영국을 탈출했던 의미가 사라질 판이었다.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스크루비의 교인들이 탈출구를 찾은 것은 신대륙으로의 이민이었다. 그들은 모국의 식민정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국고가 바닥을 보이자 신세계의 광대하고도 무한한 자원에 눈을 돌렸다. 프랑스 스페인보다 늦었지만,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정착 사업을 추진해 재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를 설립해 정착지 개발을 후원했다. 정착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정착지 개척민에게 공유지 불하 증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라이덴의 교인들은 영국 당국과의 3년간의 협상을 통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공유지 불하 증서를 받아냈다. 그들은 통제가 없는 신대륙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주에 드는 재원이 문제였다. 배도 임대해야 했고, 정착에 필요한 물품도 구입해야 했다. 가난한 그들로서는 해결책이 없어 보였다.
그때 한 청년이 상속받은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이 청년은 영국의 부유한 농장주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는 17세에 홀로 고향을 떠나 그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탈주해 왔다. 이 청년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12세때 아버지 어머니 누나 그리고 그를 키워준 할아버지까지 알 수 없는 병으로 모두 잃었기 때문이었다.
조숙한 이 소년은 ‘주네브역 성서’와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을 읽은 후 영국 국교회가 아닌 청교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가 청교도 분리주의자가 된 것은 성경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스크루비의 분리주의자들이 성경 말씀을 중시하고 회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예배를 보고 그들과 신앙을 같이 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에 따라 그는 네덜란드의 라이덴까지 왔던 것이다.
이제 이 청년은 그들과 함께 또 다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날 결심으로 전 재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아마 이 청년이 없었다면, 미국 건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메이플라워호의 출범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누구인가? 바로 메이플라워호의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인 메이플라워호 계약을 초안한 월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 1590∼1657)였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