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5) 성녀 클라라
입력 2012-04-15 18:28
평생 가난에 몸 맡기고 주님 찬미한 프란체스코 여제자
한 사람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면 사람은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는가? 아시시를 떠나기 전에 갑자기 이 질문이 떠오른 것은 클라라 때문이다. 프란체스코가 남긴 충성스러운 여제자 클라라를 두고 아시시를 떠날 수는 없었다.
아시시에서 프란체스코를 만났다면 클라라도 만나야 한다. 서둘러 프란체스코 대성당에서 빠져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담하고 예쁜 중세풍의 집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집들 사이로 난 벽돌 보도 블록을 따라 계속 걸었더니 꼬무네 광장이 나타나고 미네르바 신전이 나타났다. 그곳을 지나 좁고 반질반질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언젠가 한번쯤 와본 것 같은 긴 골목을 지나자 드디어 작고 아담한 교회가 나타났다. 성녀 클라라를 기념한 키아라 교회다. 800년 전 이곳에서 프란체스코의 이상을 가장 강하고도 아름답게 실현했던 성녀 클라라가 살았다.
영성의 역사에는 남성 말고도 탁월한 여성들이 많다. 빙엔의 힐데가르트(1098∼1179)는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독일 신비주의의 새벽을 열었다.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는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성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하는 순례자들을 안내했다. 귀용 부인(1648∼1717)은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된 후 상상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의 삶을 살았다. 이블린 언더힐(1875∼1941)은 신비주의 연구로, 시몬 베이유(1909-1943)는 철학자요 사회운동가이며 신비가로, 그리고 마더 테레사(1910∼1997)는 인도 캘커타의 성녀로 각각의 이름을 남겼다.
클라라도 여성 영성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1193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앙적 영향 가운데 믿음으로 자랐다. 그녀의 삶의 운명은 우연히 듣게 된 성 프란체스코의 한 번의 설교로 결정되었다. 어느 날 기도하러 성 루피노 성당에 들어갔는데 성 프란체스코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의 타락성에 대해 프란체스코가 설교할 때 클라라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광석화와 같은 깨달음이 임했다. 이것이 그녀의 구도의 삶의 출발이었고, 그 후로 한 번도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단 한 번으로 영혼을 사로잡은 설교는 어떤 것일까? 설교의 영광이 사라진 이 시대에 설교자는 그런 영광을 다시 한 번 꿈꿔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의 설교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설교자도 자기 길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클라라는 그 길로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모험의 길로 나섰다. 프란체스코 성당에 도착한 클라라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고 프란체스코는 그의 머리를 자르고 수도복에 허리띠를 해주었다. 가족들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달려왔지만 그녀는 제단으로 달려가 이미 밀어버린 자기 머리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선언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일생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와 자신의 영원한 스승 프란체스코를 따랐다.
다만 클라라가 프란체스코와 달랐던 것은 그녀의 스승과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살았던 성 다미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아마도 그녀는 초기 교회에서부터 있어온 봉쇄 수도원의 전승을 이어받은 것 같다. 그 속에서 그녀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철저한 가난이었다. 그것은 가난을 부인 삼은 스승 성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길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빌려온 삶이요, 이 세상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 ‘클라라 회칙’ 3, 6∼9에 의하면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또한 1년 내내 단식도 했을 만큼 음식은 아주 간소하고 소박했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함께 자는 공동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그리고 잠자리는 긴 벽을 따라 일렬로 배치된 크고 누추한 방이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다른 수도자보다 훨씬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에는 프란체스코가 먹으라고 명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가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믿기를,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무력하게 사신 것은 인류가 영적으로 빈궁하여 영원한 가치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영적인 부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완전한 가난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의 길은 하늘나라로 가는 좁은 문의 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가난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지속적인 기도의 생활이다. 클라라는 말년에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으며 특히 금요일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깊이 심취되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자매들은 그녀의 기도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어머니 성녀 클라라는 밤낮으로 꾸준히 기도를 하셨다. 클라라 어머니는 저녁 끝기도 후 긴 시간 기도에 머물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곤 했다.”
토마스 첼라노가 집필한 ‘성녀 클라라의 전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클라라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고 눈물은 애도의 격정 때문에 마를 줄을 몰랐다. 어느 날 마귀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너무 울면 못쓴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너의 뇌가 눈물로 녹아서 코로 흘러나와 코가 삐뚤어질 것이다.’ 이에 그녀가 재빨리 응수하였다. ‘주님을 아는 이는 조금도 삐뚤어지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는 또 울면서 기도했다.”
기도의 사람 클라라도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죽음이 임박한 때 클라라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그분이 보이는 것처럼 여러분도 저 영광의 왕이 보입니까?” 감동을 받은 자매들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흘리며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흐느낌이 지나간 후 짧은 침묵의 순간을 깨뜨리며 클라라가 말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주시고 또 이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때가 1253년 8월 11일 석양이었다. 그 유해가 지금 아시시의 클라라 성당에 있다.
조용히 그녀 앞에 섰다. 작은 이탈리아 마을 아시시를 베들레헴만큼이나 유명하게 만든 두 사람, 성 프란체스코와 클라라. 나도 성 프란체스코처럼 오직 주님만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성도들로 하여금 나를 닮아 주님께 헌신하는 클라라 같은 제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시시를 내려오면서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제자인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의 충성스러운 제자인 클라라가 얼마나 이 시대에 귀한 사람들인가를 생각했다.
◎ 클라라의 삶
-항상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 입어
-사시사철 맨발, 삭발한 머리엔 흰 두건과 검은 수건
-잠은 춥고 누추한 방 맨바닥서 나무토막 베개삼아
-식사는 대개 하루 한 끼,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으며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줘
이윤재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