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심는 인생

입력 2012-04-15 18:03


감자는 쓰이는 용도에 따라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먹는 용도고 또 하나는 심는 용도다. 대부분은 먹는 감자지만, 그러나 다음 해 농사를 위해 준비된 감자를 씨감자라고 한다. 씨감자는 먹어서는 안 된다. 큰 일 난다. 다음 농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감자를 놓고서 이를 먹는 용도로 보느냐 아니면 심는 용도로 보느냐, 이 관점은 중요하다. 만약 심는 용도를 먹어 없애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어느 쪽일까? 먹는 용도일까 심는 용도일까? 우리의 인생은 먹어서 없애는 것인가, 아니면 심는 것인가? 후자다. 우리 인생은 심는 용도다. 성경은 “썩을 것으로 심고” “죽을 것으로 심고” “욕된 것으로 심고” “약한 것으로 심고” 반복해서 ‘심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임금님이 왕후가 될 며느리를 간택하기 위해 젊은 처녀들을 선발했다. 그들에게 쌀 한 되박만을 나눠 주면서 한 달을 살라고 했다. 한 달 후 여인들이 다시 모였다. 대부분 피골이 상접했다. 그런데 유독 한 여자만은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가 임금님에게 드릴 떡 한 시루를 가져왔다. 임금이 ‘너는 어떻게 하였느냐?’고 하자 “저는 한 되박으로 떡을 만들어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를 해서 실컷 먹고, 이렇게 남아서 임금님께 가져 왔습니다”고 했다. 합격이었다.

차이가 무엇인가? 한가지다. 관점의 차이다. 한 되박의 쌀을 과연 ‘어떻게 쳐다보느냐’의 차이다. ‘먹는 용도로 볼 것이냐, 심는 용도로 볼 것이냐’ 이것이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주실 때, 결코 먹는 용도로 주시지 않았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장사를 하라고 하셨다. 심는 용도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먹는 감자가 아니라 씨감자다. 이것을 오해하는 것, 그것이 일생일대의 가장 심각한 오해다.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을 보나마나 실패다.

요즘 ‘웰빙’이라는 단어는 식상할 정도로 보편화 됐다.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이다. 믿는 사람들도 가장 큰 기도제목은 건강이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위한 건강이란 말인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다. 더 많이 누리기 위한 건강이 아니라, 더 많이 심기 위한 건강이다.

악착같이 1분1초라도 더 오래 살아서 하나라도 더 심기 위한 건강이다. 오늘은 한걸음을 물러나서 내 인생을 쳐다보는 것이 어떨까? 너무나도 단순하고 근본적인, 인생을 보는 관점, 여기서부터 다시 점검해보는 것이 어떨까? 얼마나 심었는지, 주께서 물어보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마음이 조금은 다급해지는 것을 감출 길이 없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