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강철로 된 조각작품의 거대한 갤러리”… ‘페가서스 10000마일’

입력 2012-04-12 18:34


페가서스 10000마일/이영준/워크룸

“중국 상하이에서부터 영국 사우샘프턴까지 10000마일의 항로. 길이 363미터의 배에 실린 6700개의 컨테이너와 90끼의 식사, 디지털카메라와 HD급 캠코더, 노트북 컴퓨터와 바다의 역사에 대한 세 권의 책, 호기심 어린 눈동자와 귀, 거친 바다에서 벌어진 온갖 일들에 대한 수많은 대화와 한 마리의 죽은 고양이. 이것이 내가 초대형 컨테이너선 CMA CGM 페가서스를 타고 겪은 여행의 내용이다.”(‘머리말’)

기계비평가 이영준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기계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하는 프랑스 해운회사 소유의 13만t급 컨네이너선 페가서스에 탑승하기까지 섭외 기간만 5년이 걸렸다. 왜 그렇게나 긴 시간이 걸렸을까. 저자에 따르면 기계라는 스펙터클이 우리 삶으로부터 격리돼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나 음악은 비평가의 손길을 기다리지만 기계는 비평가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페가서스에 탑승한 이유는 오히려 간명하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라는 기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바다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배와 어떻게 만나게 하는지, 강철이라는 물질은 배가 어떻게 바다와 만나게 하는지, 그리고 그런 만남은 역사적으로 어떤 단계에 와 있는지가 이런 항해 여행 겸 비평 여행에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6쪽)

16분. 페가서스가 전속력으로 달리다 완전히 멈추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은 세상에 어떤 것도 페가서스를 멈추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힘과 크기에서 인간을 완전히 압도하고 초월하는 기계를 만들어놓고 그 기계를 제어하느라 투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쓴 기계비평서라 할 수 있다.

“강철은 굳건하고 강하다는 선입견과 달리 열에 약하며, 삭막하다는 선입견과 달리 의외로 온갖 부드러운 모양을 하고 있다. 배는 강철로 된 조각 작품의 거대한 갤러리다.”(137쪽)

“물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출렁이고 때려대고 밀쳐낸다. 물은 배를 떠 있게 하는 지지체이지만 또한 거대한 장애물이자 재난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배는 물에 적응해야 한다. 배가 물을 바꿀 수는 없다.”(144쪽)

“저급한 기름인 벙커씨유를 쓰는 이유는 오로지 값이 싸서다(톤당 500불). 만일 벙커씨유 가격이 올라가면 해상 운송료가 올라갈 것이고 그러면 해상으로 날라야 하는 모든 것들의 값이 다 올라갈 것이다. 그 연기는 단순히 사라지는 기체가 아니라 자세히 보면 깨알 같은 검댕이다.”(152쪽)

사실 이영준의 작업은 기계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페가서스라는 거대한 강철 구조물뿐만 아니라 거기에 동승했던 선장이며 갑판원이며 주방장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상하이에서부터 페가서스에 동승한 자가 있다. 사람이라면 밀항자로 적발되어 처벌받겠지만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죽은 채 컨테이너 위에 놓여 있는 고양이였다.” 페가서스와 함께한 탐험의 판타지는 이렇게 지상에서 영원을 오간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