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에버트 “나는 내 인생이라는 영화 안에 태어났다”

입력 2012-04-12 18:34


로저 에버트/ 로저 에버트/연암서가

1967년부터 미국 ‘시카고 선 타임스’에 몸담아온 로저 에버트(70)는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영화비평가다. 신문은 물론 2006년까지 텔레비전에 고정출연해 온 그는 갑상선암 치료에 따른 합병증으로 얼굴의 하관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먹고 마시고 말하는 입의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버트는 목소리를 잃은 뒤 오히려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가 됐다.

수술로 인한 기형적인 얼굴로 사회적 활동마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태라면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은거하기가 십상이다. 그는 달랐다. 다양한 행사장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내밀었고 자기 이름을 내건 영화를 찍듯, 자서전을 써내려갔다. “나는 내 인생이라는 영화 안에 태어났다. 비주얼이 내 앞에 있었고, 오디오는 나를 에워쌌으며, 플롯은 ‘반드시’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더라도 필연적으로 전개됐다. 내가 어떻게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출연은 계속 나를 즐겁게 해줬다.”(13쪽)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 상실한 것들, 집착하는 것들,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된 과정, 결혼, 정치관, 영적 믿음들을 연대기로 기록한다. 함께 신문사에서 일했던 친구들, 오프라 윈프리와 스터즈 터켈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의 우정을 비롯해 리 마빈, 로버트 미첨, 존 웨인 등 영화배우와 잉마르 베리만과 마틴 스코세이지, 베르너 헤어초크 같은 감독들에 대한 글은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선 타임스’를 위해 처음으로 쓴 영화 리뷰는 프랑스 영화 ‘갈리아’였다. 나는 월드 플레이하우스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 영화를 리뷰하고 있다는 인식에 충만해 있었다. 그런 후 사무실로 돌아가 ‘이 영화는 해안으로 떠밀려오는 프랑스 누벨바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쉰 헐떡거림’이라고 썼다.”(234쪽)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대목은 얼굴 재건 성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그가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관한 진술이다. “그러나 이 얼굴은, 얼마나 불완전하냐와 무관하게, 여전히 내 것이다. 나는 이 얼굴의 소유자다. 나는 이 얼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이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는 여전히 내면에, 바로 여기에, 머릿속에서 밖을 내다보며 존재한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나는 여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574쪽) 윤철희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