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스런 엄마가 암에 걸렸다, 그것도 6개월 시한부 삶… 윤석화 주연 따뜻한 가족드라마 ‘봄, 눈’

입력 2012-04-12 17:55


소리 좀 그만하라며 큰소리 탕탕 치는 남편, 자기 살기에 바빠 가족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두 딸, 그나마 엄마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순둥이 막내아들. 티격태격하는 가족들의 살림을 도맡아 병원 청소부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엄마.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내하는 엄마가 암에 걸렸다.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청천벽력의 진단.

영화 ‘봄, 눈’은 불치병에 걸린 엄마와 가족들의 마지막 이별을 그린 드라마다. 사실 스토리와 결말은 뻔하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조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승화시킨 데는 배우 윤석화(56)가 있기에 가능했다. ‘레테의 연가’(1987) 이후 2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윤석화는 이번 영화에서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애틋한 연기부터 죽음을 앞둔 삭발연기까지 해냈다.

지난 9일 시사회 후 가진 간담회에서 윤석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주인공이 아닌 일반 관객의 심정으로 봤는데 우리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랄까”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호강도 못하고 고생만 하시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께 드리는 따스한 봄날 같은 선물”이라고 소개했다.

영화는 이번 작품으로 장편 데뷔하는 김태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부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김 감독은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큰누나를 엄마처럼 의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큰누나도 막내동생을 유달리 사랑했다고. 하지만 10년 전 큰누나가 암으로 숨지면서 오랜 시간 충격과 허탈에 빠져 있다 영화화를 결심하고 대본을 썼다.

김 감독은 “처음부터 윤석화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을 하면서 큰누나 같고 엄마 같은 그의 연기 덕분에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뮤지컬 프로듀서 등으로 활동하는 윤석화는 김 감독의 주인공 캐스팅 제의에 “신인 감독의 영화에 신인이라는 각오로 연기하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고.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후 30년 넘게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웃기고 울린 윤석화가 아니던가. 그의 캐릭터는 영화 ‘봄, 눈’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가족들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는 대목에서는 특유의 속삭이는 듯한 화법이 묻어났다. 영화 배경이 부산이고 자식들도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극중 전라도 출신이라는 그는 유창한 서울말을 사용해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암 진단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연기다. 애써 눈물을 삼키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든다. 무심한 듯 자상한 남편 역의 이경영과 딸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친정엄마 역의 김영옥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김 감독의 자화상인 아들 영재 역을 자연스럽게 해낸 임지규의 이미지가 신선하다.

남편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 친정엄마와 병상에 누워 노래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장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잔잔한 미소와 함께 눈물 한 방울 떨어지는 장면 등이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엄마는 떠나고 추억만이 남아 있는 이듬해 봄날, 딸의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창 밖에서는 눈이 내린다. 삶은 또 다시 시작된다. 26일 개봉. 전체 관람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